저는 가끔 밤이 되면 창가에 앉아 야구장 저편에 보이는 그녀 아파트의 조그만 불빛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그만 불빛이란 건 참 좋더군요. 저는 비행기 창으로 밤의 지상을 내려다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그만 불빛이라는 게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한 것인가 하구요.
--- p.171-172, --- '야구장' 중에서
자기 표현이 정신의 해방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나쁘게 말하면 미신이며, 좋게 말하면 신화이다. 적어도 문장에 의한 자기 표현은 어느 누구의 정신도 해방시키지 못한다. 만약 그런 목적을 위해 자기 표현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기 표현은 정신을 세분화할 뿐, 그건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만약 어딘가에 도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건 착각이다. 사람들은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쓰는 것 자체에는 효용도 없으며, 그것에 따르는 구원도 없다.
--- 머리말
위에서 찬찬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 풀장은 조금씩 현실감을 상실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풀장의 물이 너무 투명하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풀장의 물이 필요 이상으로 맑은 탓에 수면과 바닥 사이에 공백이 생긴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풀장에서는 두 사람의 젊은 여자와 한 사람의 중년 남자가 수영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을 한다기보다 마치 그 공백 위를 조용히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풀 사이드에는 하얗게 칠해진 조망대가 있고, 체격 좋은 젊은 구조원이 지루한 듯이 수면ㅇ르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대충의 이야기를 끝내자 손을 들고 웨이트리스를 불러 맥주를 더 주문했다. 나도 따라 주문했다. 그리고 맥주가 올 때까지 둘은 또 풀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의 밑바닥에는 코스로프와 수영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 p.76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맞춰 넣을 수 있는 인생이라는 운행 시스템을 소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시스템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회전목마를 닮았다. 그저 정해진 장소를 정해진 속도로 순회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아무데도 갈 수 없고, 내릴 수도 갈아탈 수도 없다. 누구를 따라잡을 수 없고, 누구를 추월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회전목마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치열한 데드 히트를 벌이고 있는 듯하다.
--- p.13 글머리에
여기에 수록된 작품은 『IN.POCKET』이란 고단사의 문고 PR지에 연재된 것들이다. 연재 형식은 '듣고 쓰기'였다. 쓰는것은 나라는 1인칭 화자이지만 얘기는 다른 사람이 한다. 그러니 실은 전부 내가 꾸며낸 전혀 모델이 없는 이야기다. 나는 다만 '듣고 쓰기'라는 형식을 빌려 애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들은 창작된 '소설'이다.
나는 이 연재를 통해 리얼리즘 문체를 쓰는 훈련을 하고자 했다.그 당시 나의 과제는 자신이 리얼리즘 문체를 어느 만큼 구사할 수 있는가였다. 내가 '듣고 쓰기'형식을 취한 것은 『그레이트 개츠비』의 화자 닉 갤러웨이에게 줄곧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닉 갤러웨이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피츠제럴드는 닉 갤러웨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자신을 상대화하고, 제이 개츠비란 인물을 멋들어지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나 역시 리얼리즘이란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로는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을 철저하게 듣는 이로 한정하기로 했다. 이런 리얼리즘 훈련의 귀착지는 말할 것도 없이 『노르웨이의 숲』이다. 나는 말하자면 이『회전목마의 데드히트』란 리얼리즘을 다양한 각도에서 거듭 반복함으로써 『노르웨이의 숲』의 초안을 잡은 것이다. 물론 양자의 내용에는 통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 훈련 없이 『노르웨이의 숲』이란 소설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는 서문 형식으로 썼다.
여기에 씌어 잇는 것은 거의 거짓이지만, 내가 이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순수한 진실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정직한 문학전 선언이다. 내가 여기에서 시도한 것은 리얼리즘이란 것을 일관된 100% 거짓말로 쳐바르는 것이었다. 긴 세월 손때가 절어붙도록 사용된 리얼리즘이란 것을 비틀어 내 나름의 방식으로 소생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류의 절대적잊 진실 같은 것을 집어내보고 싶었다.
나는 이 작품집 중에서는 '레더 호젠'이 제일 잘 쓴 작품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화제에 잘 오는 것은 '풀 사이드'다. 인생의 전화점이란 것은 많은 사람에게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모양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내 작품을 말한다' 중 <회전 목마의 데드히트> 부분
사실이라는 게 어떤 경우에는 기묘하게, 혹은 부자연스럽게 비치는 것은 어쩌면 그 탓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의지라고 일컫는 일종의 내재적인 힘의 대부분은, 그 발생과 동시에 상실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공백이 우리 인생의 다양한 위상에 기묘하고 부자연스러운 왜곡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 p.13
내가 기거했던 집의 친구는 내가 기억하는 한 시종일관 그녀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반할 만한 타입의 여자였다. 나 역시 좀더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첫눈에 그녀에게 열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다. 세 가지 포인트를 확보하기만 하면, 그 대부분의 특질을 커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총명해 보이고 2.활동적이며 3.요염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몸집이 작고 말랐지만 균형 잡힌 몸매였으며, 온몸에 에너지가 흘러 넘쳐 보였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입술은 야무지게 한 일자로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다소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가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주변 공기는 마치 뭔가 기적이 일어난 듯이 일순간에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녀의 인격에 관해서는 호의를 갖고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의 미소만큼은 좋아했다. 어쨌거나 매력적인 미소였다. 예날에 고등학생 시절 영어 교과서에서 '봄에 사로잡혀(arrested in a springtime)'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미소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대체 누가 따뜻한 봄의 햇살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 p.86-87
'구토하는 건 학생 시절에 몇 번인가 폭주를 했을 때 경험해 본 적 있었지요. 뱃멀리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구토라는 건 그런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구토 특유의 위가 조여드는 듯한 감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위가 아무런 생각도 어뵤이 먹은 것을 위로 밀어 올려내는 것뿐입니다. 연루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불쾌감도 없고, 토할 것 같은 냄새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 p.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