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고
격렬한 변혁기의 현장을 살아내야 했던 여성 영웅의 이야기
소설 문명왕후, 역사 속에 묻혀 있던 한 여성 영웅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명왕후(文明王后) 김문희는 그녀의 이름보다는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누이이자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아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어머니이자 신라를 태평성대로 이끈 신문왕의 할머니이며,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薛聰)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렇듯 한 시대의 중심 인물들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지금껏 어떤 형태로든 한번도 연구된 적이 없었던 문명왕후 김문희의 화려하면서도 고통스럽고, 잔잔하면서도 열정적이었던 생애를 담았다.
사실 그녀는 언니의 꿈을 빼앗고 오빠인 김유신의 책략으로 횡재한 여자처럼 역사 속에서 오도되어 왔다. 하지만 거대 중국의 위협 아래 풍전등화와 같던 삼국이 최초의 통일을 이뤄 외세를 물리친 그 역동의 한 가운데서 의연히 등불을 들어 시대를 밝혔던 여인인 김문희는 1,300년 후에 와서야 한 여성작가의 손끝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그녀는 동양의 신데렐라이다. 신분의 차이로 절대로 결합할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꿈'을 가짐으로써 불가능한 현실을 화려하게 이루어낸 신데렐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뿐만이 아니라 삼국 통일의 숨어 있는 주역이 되기까지 그녀를 움직인 것은 운명이 아니라 의지이고, 얼굴이 아니라 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다리는 여성이 아니라 찾아 나서는 여성,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현명한 여성이었다.
"나는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어머니였지만 그 누구의 아내나 그 누구의 어머니만으로 살지 않았다. 나, 김문희, 그것이 나의. 주체였다. 아내며 어머니는 그 김문희의 몫일 뿐이었다."
위의 술회는 그 자체로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의한' 고백서이자 선언서에 해당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문명왕후 김문희에게서 읽어야 할 것은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풍요로운 여성성의 개화이다. 남성과 대립하는 소모적인 힘이 아니라 여성다움으로 여성다움을 극복하고 확장시키는 힘이다.
서기 572년, 진흥왕 33년 3월의 어느 날 밤. 진흥왕과 정비(正妃) 사도왕후(思道王后)와의 유일한 적자(嫡子)인 동륜태자(銅輪太子)가 개에 물려 죽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개의 주인은 미실궁주(美室宮主). 바로 법흥왕의 후궁이었던 묘도부인이 신라의 전승접대(傳乘接待)의 규범대로 역시 같은 왕족인 미진부(未珍夫)와 재혼하여 낳은 딸이었다. 용모와 자태가 매우 뛰어나며, 학문이 높고 문장이 유려한 그녀는 소녀 시절 한때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 사다함(斯多含)과 연인사이이기도 했지만,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데는 실패한다. 스물 네 살에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된 미실궁주는 한 국가의 운명을 뒤엎을만한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태자의 참사에 연류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하지만, 그녀를 아끼던 진흥왕에 의해 구제된다.
한편 소판 서현의 막내딸로 태어난 김문희는 어느 날 길을 잃고 헤매이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미실궁주의 눈에 띄어 집까지 무사히 돌아오고, 그 둘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다. 김유신과 김문희의 어머니이자 신라 왕족출신인 만명부인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탄하며, 자식들을 엄하게 키운다. 김유신이 기녀인 천관(天官)에게 빠진 것을 눈치채고는 엄한 다스림으로 질책하여 김유신에게 사랑 대신 천하를 손에 쥘꿈을 꾸게 만든다.
하루는 문희의 언니인 보희가 '서형산 마루에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가득찼다'는 꿈 이야기를 듣고 비단 치마를 꿈값으로 주고 언니의 꿈을 산다. 며칠 뒤에 오빠인 김유신이 김춘추와 공을 차다가 그만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내고 만다. 이에 김유신은 보희에게 옷수선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막내 문희에게 그것을 수선하도록 한다.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김문희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김춘추와 문희는 조금씩 사랑을 키워나가게 되지만, 혼인도 하기 전에 문희가 아이를 가지는 신라 최대의 스캔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을 호기로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풀어나가려 한다. 한편 그 사실은 안 미실궁주는 문희를 죽이기 위해 다시 개를 풀어놓는데….
이 소설은 역사 속에서도 침묵의 황무지 속에 갇혀 소외되었던 여성 영웅의 일대기를 흥미롭게 펼쳐보인다. 신라에 합병 당한 가야 왕족의 후예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나중에 숭앙받는 왕후의 자리에 오른, 태종무열왕의 아내이자 김유신의 누이이며 문무왕의 어머니인 김문희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이다. 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뿐만이 아니라 삼국 통일의 숨어 있는 주역이 되기까지 그녀를 움직인 것은 운명이 아니라 의지였고, 미모가 아니라 지혜였다. 때문에 그녀는 기다리는 여성이 아니라 찾아나서는 여성,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현명한 여성이었다. 언니 보희의 길몽을 사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버리거나, 사랑하는 김춘추의 정부인이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지략을 세워 사랑을 쟁취한 것, 권위나 명예를 이용해 신하나 백성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고 예지와 관용으로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지닌 삶에 대한 통찰력 때문이다. 그녀에게 중요했던 것은 '어떤 지위'에 오르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였다.
우리가 이 책 『문명왕후 김문희』에서 읽어야 할 것은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풍요로운 여서성의 개화이다. 남성과 대립하는 소모적인 힘이 아니라 여성다움으로 여성다움을 극복하고 확장시키는 힘이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선택과 결단의 힘든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거나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실천력을 겸비한 선구적 여성이다. 이 소설이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고소설이나 인물소설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도 유의미한 역사소설이자 여성소설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김미현(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