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독이란 삿된 것에 의지하는 바 없이, 오직 천리와 연결된 자신을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그로써 주체적으로 자립하며, 한결같이 삼감으로 도리에 벗어나지 않고, 지극한 마음으로 충만하게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다. 유학의 개념인 신독에서 말하는 천리를 밝힘, 천리와 연결됨은 곧 기독교계에서 말하는 하나님, 불가에서 말하는 관세음을 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곧 신을 만나는 것이다. 즉 신독(愼獨)은 신(神)을 독대(獨對)하는 것이니 신독(神獨)인 셈이다. (37쪽)
마음을 통제하는 길, 인심을 붙잡는 길은 삼가는 것이니 신독하는 일이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삼가는 것을 반복하면 마음은 길들여진 보라매처럼 부르면 자기 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음이 길들여질 때까지 미친 소, 미친 원숭이, 미친 망아지와 한판 승부를 해야 한다. 그 작업이 은미하다면 은미할 수 있을 것이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 것처럼 처음에는 달래면서 온갖 장치를 설치하고 도심으로 돌아오게 하는 훈련을 한다. 처음에 삼가서 도심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잘 안 되면 보상책 같은 것으로 설득하거나 속여야 한다. 급하게 붙잡으려고 서두르면 금방 도망가고 말기에 유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88-89쪽)
혼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은 자극의 대상을 끝없이 찾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지속적으로 특정한 욕망의 대상을 헤맨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구걸하는 노예처럼 불행하게 한다.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은 돈이 들지도 않고, 누군가를 위해 복무하는 것도 아니고, 내 욕망을 위해 분주한 것도 아니다.
홀로 가만히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도 평안과 자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자극들의 세계, 소음의 세계에 젖어 있는 우리들에게는 심지어 도를 깨친 도인들이 터득한 대단한 삶의 기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익혀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그저 되찾아야 할, 우리가 어느새 잃어버린 삶의 본질이다. (130쪽)
얻지 못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자득, 자겸, 자족이니, 어디에 처하든 그 위치에 바른 도리를 반드시 얻는다는 것이고,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스스로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임금이 평민일 때는 거친 밥을 먹으며 밭 갈고 소일하며 헐벗은 채 낮잠을 자기에 거리낌이 없었고, 왕이 된 후에는 문무백관의 공경을 받고 끼니마다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수랏상을 받으며 정사를 베푸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시중이다. 신독은 시중의 방도이니, 자신을 비워 도심에 이른 후 세상의 모든 변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202-203쪽)
정성스러움을 실천하는 대표 방법 중 하나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는 것, 말을 삼가는 것을 유충정공은 7년에 걸쳐 충실히 실천해 얻었다. 겉과 속이 같고 언행이 일치되어 한결같음을 얻었다. 그래서 어떤 일을 만나도 마음이 평탄하고 여유가 생겼으니, 그 누가 이러한 경지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실천으로만 가능한 것이니 신독을 실천했을 때는 반드시 얻는 바가 있다. 힘써 실천하지 않고 생각으로 헤아리기만 하면 기력이 소모되지만 유충정공처럼 오랫동안 갈고닦으면 삶 전체가 바뀌는 것이다. 신독의 지혜가 아무리 훌륭해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경험하지 못했다면 제대로 안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어떻게든 실용기력(實用其力)해서 삶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272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