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라도 놓고 나갔던 통이 발각될세라 나는 얼른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책상 맨 밑 서랍을 열어 거기 가장 깊숙한 안쪽에 문제의 그 통을 꼭꼭 감춰두었다. 아니, 가슴속 남몰래 연모하는 그녀를, 김약국의 딸을 꼭꼭 그곳에 숨겨두었다. 열세 살 내 가슴앓이 사춘기의 ‘감춤과 숨김의 미학’은 그렇게 서랍 속에서 은유적으로, 시적으로 그 후로도 몇 해를 더 꼭꼭 영글어 갔다.
--- ‘김약국의 딸’중에서
그러나 체벌의 단연 압권은 대걸레자루였다. 엎드려뻗쳐 자세의 물렁물렁한 엉덩잇살에 퍽-퍽-퍽-퍽- 열 대고, 스무 대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있는 힘껏 내려쳤던 것이다. 마치 극악무도한 대역죄인을 의금부로 압송해 형틀에 사지를 묶어 사정없이 치도곤을 안기듯. 그러다가 대걸레자루가 그만 장력을 못 이겨 찌지직, 하고 두 동강이 날라치면 더 싱싱하고 탱탱한 두 번째, 세 번째 대걸레자루가 항시 순번대기하고 있었다. 그랬다. 나와 나의 억센 친구들은 엉덩이가 짓무르게 얻어터진 것도 추억이 되는 그런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 ‘親親親선생님’중에서
그러한즉, 이 학년 저 학년, 그리고 이 반 저 반, 이 팀 저 팀, 그냥 마구잡이로 뒤섞여 게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적으로 또 이 공 저 공, 요 공 조 공, 한 코트 안에서 농구공들이 붕붕붕 떼로 날아다니게 됐다. 한창을 그러다 보면 게임을 시작했을 때 처음 가지고 놀던 공과 끝났을 때 가지고 있게 되는 공이 서로 다른, 웃지 못 할 일까지도 벌어졌다. 중간에 언제 어떻게 공들이 뒤바뀌게 됐는지 이놈들도 몰랐고 또 저놈들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부러진 안경다리’중에서
뒤주에 쌀알이 아무리 수북해 가득한들, 또 곳간에 아무리 쌀가마가 꽉꽉 채여 넘쳐난들, 그래서 안 먹어도 배가 부를 포만감이 아무리 크다 한들, 산속 우거진 잡목들 사이로 멧돼지의 힘차게 굽어진 등선이 내비쳤을 때의, 그 터질 듯한 희열감을 어찌 감히 따르리오. 아아, 저놈을 놓친다면 내가, 또 내 처자식이 다시 몇날며칠을 더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압박감 속에 번득이는 그 심장 뛰는 희열감을!
--- ‘아, 초코파이!’중에서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하는 그 애의 막내 남동생도 같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녀석이 우리 집에 들어와 앉자마자 별안간 글쎄 똥이 마렵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 그러자 다음은 어떻게 됐겠는가. 그 애 엄마께서 녀석을 황급히 바깥 화장실로 데리고 나가셨겠지. 수북한 먼저 똥 위에 나중 똥이 또 수북이 쌓여있는 바로 그 재래식변소 말이다. 한여름 철이었으니 똥더미에 아마 구더기들 족히 수십 마리는 구물구물, 굼실굼실 거렸겠지. 녀석은 기겁을 하고 뛰쳐나왔겠지. 아마 더럽고 무섭다고 울음까지 터뜨렸는지도 모르지. 자, 똥은 마려워 죽겠다고 그러지, 그런데 똥은 또 죽어도 거기서 못 누겠다고 그러지. 아들 녀석이 이래도 죽겠고 저래도 죽겠는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그 애 엄마인들 달리 뭘 어쩌시랴. 결국은 일분일초라도 빨리 당신 집의 그 청결하고 안락한 수세식으로 녀석을 긴급 수송할 밖에.
--- ‘수세식 똥, 재래식 똥’중에서
또 있었다. 혹시라도 하늘에 쌔애액, 전투기 나는 소리나 뚜두두두, 헬리콥터 나는 소리가 났다 하면 형이나 나나 후닥닥 쌍안경을 집어 들고 어디야?, 어디야?, 하며 바깥 창문으로 모가지를 최대한 길게 뽑아댔다. 그리고 둘 중에 누구건 비행체 지점을 포착했다 하면 악착같이 먼저 보겠노라 쌍안경을 양쪽에서 서로 마구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에 ‘쌍쌍바’ 두 쪽으로 갈라지듯 찌이익, 하고 쌍안경이 두 동강 안 난 것이 참으로 천행다행일 뿐이었다.
--- ‘사라진 보물1호’중에서
그러나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이 여행에서 건져 올린 조약돌들을 꺼내어 하나하나 그 조약돌에 묻어나는 유년의 강내음을 맡아볼 것이다. 그리고 가슴 한가득 울컥, 울컥 다시 또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아뜩한 그 유년의 강을. 그리하여 진정 만인의 고향이요, 만인의 강인 그 유년의 강을. 때로는 잔잔하게 여울졌던, 또 때로는 사납게 물결쳤던 그 시절 우리들 모두의 반짝이는 ‘유년의 강’을.
---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