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여행자들을 맞이하는 것은 유형의 기념물만이 아니다. 로마에서 여행자들은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시대 등의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 주위에 혼령처럼 서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과 만난다. 미친 황제와 교황들,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 희망 없는 사랑과 섬뜩한 범죄들, 대천사와 악마들, 대리석에 영구히 새겨졌다는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끝없는 경쟁 등, 수많은 일화와 설화와 신화가, 로마의 도처에서 솟아나고 피어오른다. 나는 대리석 안내판들을 가이드로 삼아, 수백 년 동안 만들어지고 이어져온 그 전통과 신화의 길을 걷는다. 그러면서 내가 찾는 것은 로마의 역사, 로마라는 도시의 진짜 이야기이다. --- 본문 중에서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가 기원전 1세기에 쓴 대작 『로마 건립 이후』Ab urbe condita는 이런 말로 시작한다. “로마 시작 이래의 로마인들의 이야기를 여기 묘사하는 것이 과연 쓸모가 있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고대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이 고대 로마 역사가와 우리 사이에는 자그마치 2,000년 넘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런데도 나는 로마라는 역사에 다가가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 본문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소금길이었다. 지금도 로마인들은 그 길을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라고 부른다(‘살레’sale가 소금이라는 뜻이다). 동쪽 해 안의 염전에서 수송된 소금이 테베레 강의 머리 부분을 통해 내륙 쪽으로 흘러들어갔다. 강의 꼬리 부분인 아펜니노 산맥 자락에서는 농부와 양치기들이 이 “하얀 금金”의 도착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 다. 가죽의 무두질과 육류의 저장, 기타 생필품의 처리에 소금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사실,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초기 로마와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 수 세기 된 고고학적 유물과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시푸른 나무들 가운데 일반인들은 어느 것이 고대 로마의 것인지 그 증거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설사 그들이 수 세기가 서로 겹치는 그 모든 세기를 이해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로마의 초창기부터의 실체적인 유물과 대면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와 원시 로마인을 이어주는, 약 3천 년 된 게 딱 하나 남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것은 바로 테베레 강이다. 단지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 그 강은 제멋대로 흘렀고 그래서 자주 범람했 던 반면, 지금은 깔끔하게 정비되어 로마라는 도시의 의지에 고개를 숙인다는 점이다. 마치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세계의 절반이 그러했던 것처럼. --- 본문 중에서
부드러운 황혼이 깔리는 봄날 저녁이면 웅장한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오래된 계곡의 풍경은, 여행자들의 넋을 빼앗곤 한다. 아래로 내려가면 방문자들은 로마 역사의 잔해들 속에서 다소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다양한 역사의 단층들이 뒤섞여 있어 이곳이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을지 감이 안 잡힐 때도 있다. 하지만 타르페오 언덕길 정상에서는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탁 트인 조망과 함께 발아래 폐허를 내려다보노라면, 기둥과 벽의 잔해, 그 사이로 난 길, 아치형 구조물과 신전의 잔존물이 모두 꿈틀거리며 살아나 하나의 형체를 이루는 것처럼 느껴진다. “끝없는 힘”을 약속하던 찬란한 로마라는 형체가. --- 본문 중에서
왕과 그의 가족을 몰아낸 뒤, 반란자들은 공화정을 수립했다. 그동안 왕이 혼자 다뤄왔던 중차대한 과제들, 즉 군대의 통솔과 전쟁의 지휘, 재판, 그리고 제의의 주재 등을 둘러싸고, 권력이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 왕정의 폐지 이후, 로마의 실제적 통치권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권력은 두 명의 행정관magistrate에게 이양되었다. 약 1세기 반 후, 이 행정관은 집정관Consul으로 바뀌었다. 집정관은 이전 왕들과 거의 같은 권력을 누렸지만, 그것은 이제는 제한 받는 권력이었다. 즉, 두 명의 집정관은 서로의 계획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1년 동안만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 해 동안 그들은 모든 면에서 불가침의 권력을 누렸지만, 퇴임 후에는 임기 중 발생한 모든 비행非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들은 두 명의 재무관Quaestor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 본문 중에서
수로와 아피아 가도 같은 건설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자기 몫의 일을 했고, 당연히 많은 클리엔테cliente〔귀족을 따르는 평민들〕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로써 그는 훗날 집정관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로마인의 눈으로 볼 때 진정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 바로 전쟁터뿐이었다. 스키피오Scipio Africanus〔Publius Cornelius Scipio〕 장군이 그 단적인 예이다. 전쟁터에서 일구어낸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국가國歌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지금까지 거의 패배를 몰랐던 로마군에게, 칸나에 전투는 악몽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바로와 파울루스의 군대는 이 전투에서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86,000명의 로마 병사 중 최소 70,000명이 몰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니발의 용병 군대는 그다지 조직적이지 못했고, 게다가 지쳐 있었다. 그러니 그런 군대로, 훨씬 잘 훈련되고 장비도 우월했던 로마군을 무찔렀다는 것은 그만큼 한니발의 전술과 통찰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는 로마군의 대형을 포위하면서 양익兩翼과 후면을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로마군을 경악케 했다. 전투는 결국 로마의 전쟁 역사상 가장 큰 군사적 재앙으로 끝났다. --- 본문 중에서
현대인들에게는 아피아 가도가 두 가지 이야기로 알려졌다. 그 중 시기적으로 먼저인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오래 전, 아피아 가도는 베드로와 예수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다. 베드로는 로마 황제 네로의 잔인한 기독교 박해에서 벗어나고자 “길의 여왕”을 통해 로마에서 몸을 피하고자 했다. 그가 아피아 가도에 이르렀을 때, 예수의 환상이 나타났다. 예수는 베드로와 반대쪽, 그러니까 로마를 향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Domine, quo vadis?”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에 가느니라.”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몸을 돌려 로마로 향했다. 박해에 놓인 기독교 공동체와 함께 하기 위해.
아피아 가도를 배경으로 하는 또다른 유명한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보다 더 거칠고 폭력적이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스파르타쿠스]Spartacus(1960년)는 불굴의 노예, 스파르타쿠스에 의해 주도된 노예 폭동 이야기이다. 폭동은 끝내 크라수스Crassus 장군의 부대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약 6천 명의 노예들이 체포되었고, 하나씩 하나씩 십자가에 못 박혔다. 처형 십자가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천 개가 세워졌고, 수년 동안 철거되지 않았다. 경고의 의미로. --- 본문 중에서
로마 군제를 개혁한 유능한 장군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는 새로운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바로 그러한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그는 전통적인 귀족 출신이 아니라, 기사 계급 출신의 “신인”〔新人〕homo novus 원로였다. 그는 수백 년 이어온 가문을 내세우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여섯 번이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보다 로마 병사들에게 먼저 표준 장비를 챙겨주었고, 군단의 병력 편제를 표준화했으며(6천 명, 10개 대대), 국가 부담으로 군사 장비를 지급함으로써 무산자들도 입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마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직업적 군제를 만들었다. --- 본문 중에서
증가하는 국가 비용, 중간계급의 시장 확대 요구, 그리고 엘리트들 사이의 경쟁 구도- 이 모든 것이 로마의 제국주의를 추동한 힘이었다. 새로운 땅의 정복만이 새로운 국가 수입, 새로운 시장, 그리고 새로운 명예를 창출할 수 있었다. --- 본문 중에서
폼페이우스 극장의 정확한 위치와 형태가 알려진 것은 주로 『로마 도시의 형태』Forma Urbis Romae의 보존된 조각들 덕분이다. 극장은 약 3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복합건물이었다. 극장에는 우선 그리스 극장에서 모양을 따온 반원형의 관람석cavea이 있었다. 지금도 기우보나리 거리와 비스키오네 거리에서 이 관람석의 유적을 감상할 수 있다. 관람석 정면이 무대였고, 무대 배경scaena 뒤쪽으로는 아름드리 나무들과 돌기둥이 번갈아 심어진 널따란 사각 모양의 공간이 펼쳐졌다. “신성한 숲”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 녹색의 오아시스에서 로마인들은 때로는 비를, 또 때로는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 물론 연인들과 매춘부들을 위한 비밀 장소가 되었다는 소문도 없진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우리 발밑에, 로마의 변두리에 지어진 살루스티우스의 멋진 사저 유적이 놓여 있다. 아름다운 정원으로 둘러싸인 복합 저택, 바로 “호르티 살루스티우스”Horti Sallustiani라 불리는 곳이다. 널따란 정원이 딸린 이러한 사저를 로마인들은 “호르티”〔정원〕라 불렀거니와, 호르티는 두 세계의 장점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즉, 호르티는 도시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을 만큼 도시와 충분히 가까웠으면서도, 동시에 도시의 모든 소음과 악취로부터 벗어날 만큼 도시로부터 충분히 멀었다. --- 본문 중에서
햇볕이 다사롭게 내려앉는 아라파치스 박물관의 흰색 계단에 서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고대로부터 역사가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의문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전대미문의 성공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가 지녔던 대부분의 법적 권한은 다른 노련한 군인이나 정치가나 야심가들의 손에도 있었던 것인데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를 그 이전의 통치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물로 만든 것은 그의 인내와 신중함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시행한 무수 한 개혁은 그의 정치적 재능뿐 아니라 절충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그의 감각과 장기적인 계획에 대한 빛나는 안목을 보여준다. 그의 아라파치스와 영원한 휴식처를 대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음과 같은 점을 이해한 사람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로마 제국의 정점에서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을 어떻게 포 장해내느냐 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소통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하에서 전례가 없던 것은 바 로 그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의 체계적임과 그 규모였다. --- 본문 중에서
1506년 1월 14일, 펠리체 데 프레디스Felice de Fredis는 로마에 있는 그의 땅에서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로마는 항상 무언가를 산출하는 영원의 도시. 데 프레디스의 괭이가 땅 속의 단단한 돌과 부딪쳤다. 그는 자신의 이 발견이 서유럽의 (예술의) 역사를 완전히 바꿀 것임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의 발밑은 바로 오랫동안 묻혀 있던 네로의 황금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의 둥근 천장이었다. 당시 교황은 예술을 친애하는 율리오 2세였다. 교황은 소식을 듣자마자 예술가와 전문가로 구성된 대표단을 급파해 면밀히 조사하게 했다. 그 어두운 동굴 같은 곳을 답사했던 조사단원에는 미켈란젤로도 끼어 있었다. 조사단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방마다 프레스코화였고, 방마다 대리석 조각품이었다. --- 본문 중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의 마지막 후손인 네로의 상기물만 파괴하는 것으로는 새로운 황조에게 충분치 않았다. 플라비우스 황조는 여전히 시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신참자들이었고, 바로 그 점에서, 도무스 아우레아를 지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빈 터를 가지고 그들이 했던 일은 전 세계가 지금도 감사하게 여기는-날마다 길게 늘어서는 행렬로 보건대 그렇다는 얘기다-상징 정치의 주요한 사례가 된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위해 전 세계가 그때까지 본 것 중 가장 으리으리한 원형경기장을 지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건 서커스(와 빵)였다. 로마에 새로 지어진 경기장은 그것을 지은 가문의 이름을 따서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의 더 유명한 이름은 콜로세움Colosseum이다. 네로의 동상Colossus에 붙여졌던 그 이름이 천년 만에 이 원형경기장의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