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로 살아오면서 제가 무엇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보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애쓴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자기 것만 영악하게 챙기는 세상에서, 어리석도록 용서하고 어리석도록 사랑하는 바보 마음 말입니다. 언제나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이 퍼주고,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런 바보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스물일곱 살에 빈손으로 갔다가 마흔네 살에 빈손으로 돌아오면서 가슴에 담아온 많은 이야기들을 여기에 풀어놓습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글이지만,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며 충만하게 살았던 고마운 기억들입니다.
저에게 신앙은 마음 한가운데 세운 깃발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일기를 쓰듯이 매일매일 조금씩 채우고 비우는 일을 하며 지난 시간과 비교해보니, 여전히 저는 부족하고 저의 삶은 불완전하지만 자신을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는 능력은 나아졌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리고 나면, 저의
선택은 늘 조금 더 성숙하고, 조화롭고, 사랑에 다가가는 방향으로 이어지겠지요. 다시 처음 그 자리에 섰습니다. 제 영혼이 숨 쉬는 모든 곳에서 늘 그렇게 지켜보고 계셨기에 이제 제가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마음을 놓고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p.여는 글
‘고통스럽지 않은 날은, 사랑하지 않은 날’이라고 어떤 성인은 말했습니다.
내가 선택하거나 고른 것이 아닌데도
날마다 내 앞에 다가와 서 있는 고통의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끝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이 주시는 고통이기에 감당할 힘도 주신다는 믿음을 새롭게 다집니다.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처럼
하루도 즐겁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공평한 삶입니다.---p.20, 고통스럽지 않은 날은 사랑하지 않은 날입니다·
시립일시보호소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 청년. 눈으로 웃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없어 보이지는 않네요.
궁금했어요. 내가 버려졌는지, 아니면 길을 잃었는지….
버려졌겠지요? 세 살짜리가 외투를 세 장이나 껴입었네요. 그냥, 궁금했어요….”
눈물 흘리지 않고 고운 선 그으며 웃는 그의 검은 눈이 슬픕니다.
“그때가 벌써 세 살이었는데, 제 호적에는 제가 발견된 날이 생일로 되어 있어요.
호적상 나이는 스물다섯인데, 그럼 제 실제 나이는 스물여덟이란 거잖아요. 이런….”---p.162, 버려졌는지 아니면 길을 잃었는지
수도자에게 기도시간은 ‘주제파악’ 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남겨야 될 것과 버려야 될 것을 가리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종 기도와 삶이 어긋나서 자주 꿈이었으면 합니다.
기도할 때의 그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 있는 한,
삶은 나빠지지 않을 겁니다.---p.256, 수도자의 기도시간은 ‘주제파악’ 하는 시간
가족 챙기는 것도 좋고, 친구 챙기는 것도 좋지만
다른 누구보다 ‘내 영혼부터’ 잘 관리하고 아껴나가는
‘영적 이기주의자’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나 아닌 것들’에 휘둘리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살 수 있습니다.---p.30, 자신을 위한 기도부터
왜 자꾸 갖고 싶을까, 왜 자꾸 집착할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답은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서’였습니다.
우린, ‘죽지 않을 것처럼’ 삽니다.
그래서 자꾸 흔들리고, 힘들고, 괴롭습니다.
만약에, 내가 오늘 당장 혹은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진짜로’ 안다면?
지금 우리가 ‘문제’라고 느끼는 것들의 대부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될 겁니다.
내일 당장 이 세상을 떠나는데
어떻게 그토록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걱정할까요.---p.58, 죽지 않을 것처럼 살기 때문에
늘 나를 변호할 말을 남겨두는 것,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칭찬이나 인정을 기대하는 것,
말이 많은 것, 뻔뻔한 것, 조심성 없는 것,
산만한 것, 절제심 없는 것,
자의 반 타의 반 자랑하고 잘난 척하는 것,
이 모든 것들과, 이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저를 반성합니다.---p.80, 반성·
그런데 지난주에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창설 신부님과 이곳 시장 가족들, 그리고 제가 마가목 나무 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16년 전 어느 가을날 아침나절에 찍은 것이었어요. 무척 반가워서 그 사진을 거실 벽에 걸어두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이웃들이 모두 한마디씩 합니다.
“아, 수녀님도 이렇게 여리고 젊고 날씬했었네요.”
손님이 있어서 음식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어느 오후였습니다. 또 옛날의 미모(?)를 들추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궁지에 몰리는, 이제는 나이가 든 나를 불쌍히 여기는 아들 준이가 말했습니다.
“지금도 괜찮아요.”
그래요. 지금도 괜찮아요. 저는 순간순간 진심으로 정성껏 살았기 때문에 지나온 시간이 아쉽지도 않고 부럽지도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뜨겁게 살았기에, 다가오는 시간에 쏟을 열정과 정성, 그리고 제가 즐길 기쁨과 행복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지금도 충분히 괜찮아요. 누군가 숨어서 저를 바라보고 후회하고 돌아간다 해도 저는 괜찮아요. 충분히 더 행복하고 충분히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은 이 희망이 괜찮아요.
---p.111, 누구에게나 세 가지의 나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