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차게 약동하는 세계적인 대도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제일의 무역항이자 유럽 대륙의 도로, 철도, 항공로의 요지이며, 특히 크고 작은 운하가 사방으로 뻗어 70여 개의 섬을 500개의 다리로 연결하는 장관을 이루고 있어 오늘날에도 관광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이 도시는 네덜란드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17세기에는 유럽의 중심이자 가히 세계의 중심이라 할 만했다.
이곳에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니며 고가의 예술품을 경쟁적으로 사들이던 귀족들과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힘들게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나가던 거지, 튤립을 팔아 거부가 된 신부유층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주일날 교회에 갈 때 입는 외출복 한두 벌 외에는 더 이상 필요한 게 없는 시골마을 뫼이더르캄프에서 온 사무엘은, 이 거대하고 복잡하며 활기 넘치는 대도시 암스테르담에서 화가가 되기 위한 수련을 시작한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사무엘, 엄격하고 고집 센 완벽주의자 렘브란트
사무엘은 시골마을 뫼이더르캄프 출신의 열여섯 청년이다. 우연히 마을 목사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림에 눈을 뜬 뒤 오직 화가가 되고 싶다는 열정 하나만으로 암스테르담에 입성한다. 그는 작업 중인 스승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며 스승의 지시 하나하나를 새겨듣고, 스승의 입에서 감탄이 나올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노력파이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스승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사무엘은, 렘브란트로서는 아끼지 않을 수 없는 착실한 제자이다.
렘브란트는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긴 하지만 여전히 암스테르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초상화의 대가’이다. 그는 정물화가 유행하면서 주문량이 줄어 고민하지만 돈이 없어 절절매면서도 작품 활동에 영감을 주는 골동품은 어떻게 해서라도 사고야 마는 천상 예술가이다. 또 마지막 제자인 사무엘에게 친자식 못지않게 애정을 쏟고 자신의 모든 비법을 전수하기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지만, 잘못된 행동을 할 때에는 가차 없이 일침을 놓는 엄격한 스승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다
스승 같은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무엘의 꿈과 생애 마지막 걸작을 얻기 위한 렘브란트의 소망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학자로서의 책임감과 생명의 존엄성마저 외면한 외과의사 반 캄펜의 추악한 욕망으로 인해 산산조각난다.
아드리안 반 캄펜 교수가 자신의 명성을 대대손손 전하기 위해 해부학 강연을 하는 자신의 단체초상화를 청탁하며 3백 굴덴을 제안했을 때, 스승과 제자는 쾌재를 부르며 이를 신이 준 기회로 여긴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작품이 거의 마무리됐을 무렵 자신의 작품에 숨은 비밀을 알고 분노한다. 그 비밀이란, 반 캄펜 교수가 해부한 시신의 주인공이 배고픔을 못 이기고 훔친 빵 한 조각 때문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렘브란트는 그림의 배후에 있는 추한 음모를 확인한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사무엘은 렘브란트의 딸 코르넬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승의 마지막 작품을 난로 속에 던진다. 그리고 스승의 뒤를 잇는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던 꿈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인생을 살았던 렘브란트와 그런 스승을 존경했던 제자 사무엘. 그리고 그의 예술작품을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한갓 장식품으로 도구화하고자 했던 반 캄펜 교수. 이들의 대립은 예술을 둘러싼 진실이 때론 끔찍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무엘은 이 일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다. 온화하고 교양 있는 얼굴 뒤에 차갑고 냉혹한 욕망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잔인한 진실을 말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꽃의 여신, 코르넬리아
한편, 화가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타향살이를 시작한 소년 사무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활기찬 거대 도시 암스테르담과 그림뿐만이 아니었다. 당대 최고 화가에게서 그림을 배운다는 기쁨도 컸지만, 스승의 아름다운 딸이자 동년배인 코르넬리아와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는 순박한 사무엘에게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시간이었다.
‘고양이 눈을 닮은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미소지을 때 그 아이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렇게 예쁜 소녀를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볼록하게 나온 넓은 이마, 위쪽으로 살짝 휜 코, 부드러운 턱, 숱 많고 붉은 빛깔의 땋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암녹색 옷은 코르넬리아와 정말 잘 어울렸다. 언젠가 내가 코르넬리아를 그린다면 어떨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어머니와 오빠의 죽음, 경제적 어려움 등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코르넬리아지만, 그녀는 그저 예쁘기만 한 철부지 소녀가 아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사무엘에게 암스테르담을 구경시켜 주고 병에 걸린 올케를 돌보고 늙은 하녀 레베카와 함께 살림을 꾸려가는 그녀는, 힘들게 예술가의 길을 걷던 사무엘에게는 유일한 친구였고 낯선 도시에서의 외로운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순수하고 예쁜 사랑을 키워가던 사무엘은 스승의 마지막 그림에 숨은 비밀을 알고 나서 심하게 동요한다. 그때 사무엘을 다잡아준 것은 코르넬리아였다. 이미 사망한 아버지의 명예와 300굴덴이라는 거액 사이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의 명예를 택한 코르넬리아는, 사무엘이 그림을 없애는 것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무사히 암스테르담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사무엘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던 힘도, 70살이 넘은 나이에 열여섯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삶 한가운데에 코르넬리아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