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스코넨은 그동안 생일선물에 익숙해졌으며 절대로 그 짐승을 죽일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물론 우리 집사람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지요. 하지만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노부인의 집에 그 어린 것을 위해서 좋은 피난처를 마련해두었소.
“그 곰의 이름이 뭐였더라?”
주교가 호의적으로 물었다.
“제기랄.”
주교는 곰에게 어울리는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맹수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진짜 사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주교구는 그 이름에 전혀 이의가 없소. 아무렴. 그렇고말고.” --- p.79
오스카리 후스코넨은 변증론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변증이라는 말은 변호를 의미했고, 이 경우에 변증론은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한 신학의 한 분파이다. 다른 분야의 학자들은 흔히 개선의 여지없는 회의론자들, 영원히 의심하는 자들, 때로는 그야말로 냉소적인 악마들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신앙은 그리 양호한 상태가 아니다.
후스코넨 목사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극히 학문적으로 들리는 성경 해석을 무더기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제 곰 동굴 속에 누워 있다 보니, 변증론 전체, 아니면 적어도 그런 변증이 쓸데없는 허망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기독교 신앙을 학문적으로 증명해서 뭐에 쓰겠는가? --- p.118
제기랄은 소냐가 옷 다리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소냐가 잠시 침대에 앉아 쉬는 틈을 타서, 얼른 다리미를 들고는 소냐가 하던 대로 따라 갔다. 뜨거운 열판에 앞발을 데었지만 조심하는 법을 금방 배우고는, 옷의 구김살이 펴질 때까지 다리미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완벽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곰의 작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만족이었다. 그 밖에 또 무엇을 곰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뭔가를 가르치려고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까, 오스카리 후스코넨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곰이 개보다 아이큐가 높아요.”
소냐 삼말리스토가 설명했다.
“그저 관심을 기울여서 뒷받침만 해주면 된다니까요.” --- p.157
그들은 시민대학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제기랄은 오스카리와 소냐가 접시와 유리컵, 나이프와 포크로 상 차리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신도 도와주려고 나섰다. 그릇 몇 개가 박살났고, 수프도 식당 바닥으로 주르르 흘렀다. 그럴 때마다 곰은 전부 깨끗이 핥아먹고는 새롭게 다시 시도했다. 혹시라도 다칠 경우를 대비해서 소냐가 곰의 앞발에 수건 걸치는 습관을 들여 주었다. 그렇게 수건을 걸치니 진짜 웨이터처럼 보였다. 식사가 끝난 후에 제기랄은 지저분한 그릇을 주방으로 나르고 수건으로 테이블을 훔칠 수 있었다. 그러다 때로는 뒤를 닦을 때도 그 수건을 이용했다. --- p.168
소냐는 최소한 자신은 인간의 불멸을 믿는다고 한숨지으며 말했다. 최후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독실하게 살다가 죽은 자들을 무덤에서 깨어나게 하실 것을 확신해요.
후스코넨 목사는 그리 간단히 문제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깨우신다는 말이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만 말하는 게요. 아니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게요? 석기 시대 사람들은 루터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소. 그런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이오. 그들은 어쩌면 더 다감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소. 그런데도 최후 심판의 날에 하늘나라에 오를 기회가 전혀 없단 말이오……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는 어떻게 구분지어야겠소? 독실한 원숭이는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고, 아니면 하늘나라에 오르기 위해서는 말을 하고 무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겠소? --- pp.172~173
소냐가 다시 삶의 근본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렇담 창조는 어때요? 창조야말로 어쨌든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허공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어요. 신이 생명을 창조했다고요.”
“글쎄…… 그렇다면 신을 상당히 어설픈 창조주로 봐야 할 게요. 자연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인간의 창조는 대실패였소. 만약 시계수리공이 그런 식으로 어설프게 일한다면 당장 해고당할 거요. 어쩌면 이런 모든 일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여기고 명약관화하게 알고 있는 종족, 지성적인 존재가 다른 세계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 --- p.174
식사 후에 제기랄이 앞발을 한데 모아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더니, 뭐라 웅얼거리듯 주둥이를 움직였다. 양식을 주셔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곰이 성호 긋는 것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선장이 물었다, 두 사람은 한번 시험해보았다. 바실리 레온체프가 제기랄에게 몇 번 성호를 그어보였고, 오스카리 후스코넨이 명령했다.
“자, 제기랄! 해봐!”
몇 분 동안 연습한 결과, 곰은 그 새로운 기예를 습득했다. 오른쪽 앞발을 먼저 이마에서 아래로 움직이더니 다음에는 양 옆으로 움직였다. 그 몸짓은 무척 독실해 보였다. --- pp.178~179
하지만 인류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알아들을 만한 메시지는 단 한 번도 지구에 도착하지 않았다. 어두운 우주는 침묵을 지켰다. 만일 은하수 깊숙이 어딘가에 신적인 이성이 존재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미국인에게도, 러시아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타냐, 오스카리, 제기랄은 숲 속의 은신처에 누워 있었다. 밖에 피워놓은 모닥불이 발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검게 그을린 냄비에서는 찻물이 끓었다. 어느덧 늦여름에 접어들었고 바글바글 몰려다니던 솔로베츠키예의 모기떼도 서늘한 기온에 기세가 누그러져서 숲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오스카리 후스코넨은 예전의 신앙심과 하나님, 그리고 머나먼 혹성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강대한 이성적 존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타냐에게 이야기했다. 수학적인 논리에 따르면, 그런 이성적 존재는 반드시 어딘가에 살고 있어야 했다.
타냐는 목사들이 별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신앙심에 금이 간 목사들이 그랬다. --- pp.211~212
점심을 배불리 먹은 후, 후스코넨 목사가 은신처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을 향한 엘리야의 호소와 하나님의 단호한 답변이 뇌리에 떠올랐다. 북쪽의 바다에서 새까만 먹구름이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위협적으로 세키르나야 산 위를 검게 뒤덮었다. 번개가 산에 내리꽂히고 땅이 흔들렸다. 마치 하나님이 곧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제기랄은 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조아리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에게 기도하지도 않았다. 다만 흡족한 표정으로 가문비나무 가지 위에 누워 있었을 뿐이다. 숲 속의 맹수는 하나님의 징표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뇌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pp.218-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