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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0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252g | 130*195*15mm
ISBN13 9791161570716
ISBN10 1161570713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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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열이 솜털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처음 본 남자의 마음이 내 몸에 물컹 닿았다. 나도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밤이었다.
--- p.17

나는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상대는 스물다섯 살부터 삼 년 동안 교제했던 서교였다. 어찌어찌 마지막 문턱까지 갔다가 결혼이 무산되었을 때 삶의 난폭함을 알게 되었다. 삶이란 강철과 시멘트와 유리로 지어진 냉혹한 인공물이었다. 그에 비하면 사랑은 거품이고, 구름이고, 종이배이고, 새의 깃털이고, 아이스크림이었다. 그렇게도 연약하고 소용없고 흘러가는 것들이었다.
--- p.29-30

설마 그럴까, 하는 사이에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넘쳐흐르는 눈물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굵은 줄기의 눈물, 마치 수돗물을 튼 듯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말 그대로 눈물샘이 터진 것이다. 이열과 나의 세 번째 데이트였다. 여자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치려고도 않고 닦으려고도 않고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 직전에 분명히 산호색 블라우스 소매 밖으로 나온 흰 손목을 휘저으며 웃고 있었던 여자였다.
--- p.36

“저 오늘 처음 본 거예요?”
황경오가 고개를 저었다.
“수완 씨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 같아서, 얌전히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첫눈에 반했다고, 농담을 잘도 했네요.”
황경오는 나의 말을 무시하고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하고, 전문 산악인 같은 주인과 몇 마디 나누고 돌아왔다. 그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마치 긴 이야기의 서두라도 꺼내 듯 말했다.
“그거 사실입니다. 오늘이 아니라 이 년 전에.”
황경오는 감정을 극적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니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나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 p.70

그의 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점막 피부가 나의 마른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혀가 나의 앞니를 열고 들어왔다. 긴 키스였다. 한 사람만 양치질하면 된다는 밑도 끝도 없는 논리를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맑아지고 있었다.
--- p.95

내 인생에 유리 조각처럼 박힌 이중 약속, 그런 일은 어떤 여자에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떤 여자에겐 예사로운 일인지 모른다. 내겐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이었다. 교활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부주의했던 게 이유였다. 마음을 열고 한 사람을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이 동시에 다가온다. 동시성의 법칙은 연애 월드에서 꽤 알려진 징크스이다. 오랫동안 아무도 없다가, 저 먼 천체에 별자리들이 이동하듯 남자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식이다.
--- p.98

사람에게 이름이 있다는 것이 새삼 심오하게 느껴졌다. 이름은 일종의 트렁크니까. 사람들은 자기 이름 속에 경험과 기억과 꿈과 소망, 능력과 한계와 비참과 고통을 수납한다. 불행과 행복을 담고, 걸어 다니고, 밥을 먹고, 어둠 속에서 누워 잠을 자고 깨고, 그리고 마침내는 운명을 걸어 닫고 이름 속에 영면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기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 p.119-120

주말을 이용해 2박 3일 동안 도쿄에 다녀온 뒤부터 황경오에게 방에 초대해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그가 거절했다. 어찌나 단호하게 거절하던지, 방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혹은, 버젓이 아내와 사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대체 방이 왜 궁금하다는 거야?”
방은 네 존재의 증거니까, 라는 말 대신 핑계를 댔다.
“당신은 내 방에 셀 수 없이 많이 왔으니까.”
--- p.121

“수완, 그 남자의 곁에서 네가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해. 사랑을 위해 사랑하지는 마. 그런 사랑은 너를 해쳐. 너를 위해 사랑하도록 해. 희망 없이 사랑하는 건 차라리 괜찮아. 하지만 힘들거나 불편하고 슬프고 불안한 건 사랑이 아니야. 사나워지는 것도 사랑이 아니야. 힘들어지면 언제든 그만두도록 해.”
--- p.144

나는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워 이불 속에서 옷을 하나씩 벗어 방바닥에 내던졌다. 옷을 다 벗었을 때 그가 욕실에서 나와 침대로 들어왔다. 그는 내가 알몸인 것을 알아채고 웃음을 터뜨렸다. 깜찍하네. 황경오도 서둘러 옷을 벗어 내던졌다. 나는 그의 단단하고 부드러운 두 팔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일 사고가 나도 하는 수 없지.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라 해도, 아도니스, 상자 속의 남자. 그의 품속에 짙은 불 냄새와 향내가 고여 있었다.
--- p.150

이열은 나의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한 뒤 머뭇거렸다. 입을 맞출 것만 같았다. 입술이 아니어도 뺨이나 이마나 손에. 그러나 이열은 내 손을 얌전히 내려놓고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떠났다. 이열과는 스킨십이 전혀 없었다. 미처 알기도 전에 어긋난 탓도 있었지만, 서로를 알아 온 시간과 친밀도에 비하면 차가운 간격을 유지해 온 셈이었다.
--- p.175

문제의 그 해변 건물을 보러 갔을 때, 나는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 폐건물이 엄마를 닮았다는 것을. 그래서 엄마는 폐건물에 끌렸던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행복한 사람이 행복에 끌리듯, 불행한 사람은 불행에 끌리기 때문이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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