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이에서 나와 비슷한 나이, 비슷한 환경에서 살며 같은 고민을 품고 있는 중년의 사내. 바로 이것이 이 친구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들이 나누는 대화라는 건 신기하기 그지없다.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가끔은 침묵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저 젓가락 달가닥대는 소리, 술잔을 만지는 투박한 손가락 끝, 가끔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는 시선만으로도 우리는, 서로가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다. 실로 대단하다. 동질감이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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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오른 욕망만 가슴 속에 가득 찼던 시절, 한때는 그와 불 같은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만나면 번쩍번쩍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인생이 자연스레 바람처럼 방향을 바꿨던 어느 한 순간, 쓸쓸한 저녁 무렵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한둘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래야 이 세상 하직하고 눈 감을 때 조금은 덜 슬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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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말 중에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이들을 만나도 늘 예전의 친구가 그리운 것은, 인생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들의 모습만큼은 늘 한결같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늘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 늘 푸른 소나무처럼 깊이 한 곳에 뿌리 내린 채 가지를 흔들어 주는 그런 친구가 있기에 우리 우정도 숲을 이루고 희망을 키워내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그 못난 나무들처럼 재빠르지 못하고 굼뜬 친구들이, 사실상 우리 몫의 우정까지 지켜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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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몰아칠 때 서로의 어깨를 붙잡아 주고, 외로운 상갓집에서는 함께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친구. 그 친구가 내게도 좇지만 나 역시 그 친구에게도 좋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이 들면서 이제는 처신도 조심하게 되고 사람 구실에도 익숙해졌지만 정작 마음은 쭉정이처럼 공허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삶의 굽이마다 진심 어린 감동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때때로 이 같은 친구를 손에 꼽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면, 스스로가 가파른 줄 위에 선 광대처럼 느껴진다. 이 한 세상 태어나 허물없는 친구 하나 두지 못한 사람, 고운 마음 하나 드리우지 못한 사람. 그게 바로 나는 아니었던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중년들이 이런 염려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잔뜩 주름진 인생, 이 빠진 그릇 같은 인생 언저리에서 불안에 떨면서 말이다. 평생 간직할 친구 한둘 두기도 어려운 게 인생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희미하게 깨달아 가는 것이다.
--- p.89-90
모든 삶은 개별적이다. 경험도 개별적이며, 느낀 바나 머리에 새겨진 기억도 개별적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남을 가르치려 든다면 친구를 잃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의 방식을 존중해 주어라. 당신은 절대로 상대를 백퍼센트 알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나와 다르다. 이처럼 진정으로 친구 사이를 꽃 피우는 거름은 사람에 대한, 보편적이고 우호적이고 존중 가득한 태도다.
--- p.140-141
친구는 나를 더 먼 세상에 닿게 해 준다. 우리는 친구를 통해 세상 곳곳을 들여다보고, 더 멀리 여행하며, 내면의 세계를 탐험한다. 이 같은 일련의 시간을 겪어오면서 어떤 이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까지 한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친구를 얻고자 한다면 돈, 노력, 시간 좀 투자한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다. 한 번이라도 그들을 만날 때 "아, 귀찮아."라고 투덜거렸다면 생각해 보라. 다른 모든 세상사와 마찬가지로 우정이라는 열차에도 절대 무임승차는 없다.
--- p.163
인생을 살며 가장 가까운 친구는 누구일까? 젊었을 때는 연인일 테고, 결혼해서는 바로 내 삶의 절반을 지켜 주는 사람, 배우자일 것이다. 힘들 때 배우자는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준다. 배우자를 끔찍이 위해야 하는 이유를 꼽자면 말 그대로 백 가지가 훨씬 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내 평생 친구이기 때문이다. 배우자와 친하다는 것은 그와 더불어 삶과 의식과 감정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 p.225
지나친 경쟁은 순수한 신뢰 형성을 방해한다. 하지만 직장 내에서도 얼마든지 훌륭한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직장은 돈을 버는 곳인 한편, 대인관계를 확장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곳은 모든 일이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곳이다. 물론 직장 내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은 쉽지 않고, 지켜야 할 선 또한 확실하다. 그러나 사람을 친구로 맞이한다는 것은 언제나 일정한 위험이 따른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위험 부담이 있다 한들 그것을 피하려고 홀로 외로운 소나무처럼 남을 수는 없지 않은가.
--- p.231
친구 없이 흘러가는 인생은 사막을 걷는 여정과 다를 바 없다. 지루하고 갈증 나는 인생이 눈앞에 펼쳐지는 셈이다. 친구는 인생이라는 여행을 함께 해 나가는 동반자다. 여기엔 부부도 있을 수 있고, 동네의 이름 모를 빵집 아저씨도 있다. 우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함께 추구하는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부부처럼 목적지가 같아도 좋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인생의 여행지를 목표로 하는 사람과 함께 가기 힘들다. 우리 성장은 동반자를 만날 때 가속도가 붙는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연인이 될 필요 없지만, 친구가 될 만한 충분한 이유는 있다. 적어도 그들을 통해 내 모습의 작은 일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