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1945년의 특별한 두 달 동안 상황은 어느 정도 달랐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제국의 항복으로 식민지 정권이 무너졌고, 새로운 정권은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 주민 중에는 소련의 점령 자체가 새로운 독재 정권의 출발점인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밝은 장래를 기대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_ 26쪽, “서론”
소일전쟁은 1945년 8월 9월에 발발했고, 8월 15일에 히로히토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아시아 역사에서 이만큼 중요한 일주일을 찾기 어렵다. 소일전쟁은, 북한 정권 설립과 중국 대륙의 공산화의 주요인이었다. 따라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수십억 명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_ 47쪽, “소련의 참전”
소련식 공산주의 사상과 민족주의와의 관계는 복잡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소련의 공식 구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민족의식을 부인한다. 따라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국명에도 ‘러시아’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소련의 민족주의에 대한 태도는 바뀌었다. 독소전쟁 때 스탈린은 소련 인민의 사기(士氣)를 높이기 위해 러시아 민족주의를 사용했고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을 ‘민족 해방 운동’이라고 부르면서 지지했다. _ 59쪽, “소련 점령 정권의 설치”
소련은 조선을 합병할 계획이 없었다. 언젠가 조선에서 형식상의 독립 정권을 세워야 했다. 이 정권 설립의 첫 단계는 언제였는가? _ 95쪽, “소련군의 지배”
“나에게 김일성에 대한 첫인상은 그가 기묘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죠. 착하고 동시에 악한 사람 말이에요. 외견상 아주 착한 사람처럼 보이고, 더 자세하게 보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보이죠. 그는 물론 참으로 훌륭한 모략가였죠. 전쟁 때 같이 일했을 때 나는 그가 앞으로 누가 될지 상상하지도 못 했지요.” (유성철과 한 인터뷰, 1991년 1월 18일) _ 116쪽, “김일성 옹립의 과정”
“우연히, 이것은 완전히 우연한 것이었거든요.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저는 맨 처음에 당시에 평양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알아서 이 문제에 대해 관심도 많이 없었거든요. 당시에 누구도 어떤 꾀도 부리지 않았고, 계획도 만들지 않았고, 모든 것은 우연히 결정되었죠. 아무 김 씨나 박 씨나 이 씨나 이 자리에 나오게 될 수도 있었겠죠. 인맥은 모든 것을 결정했죠. 군인들이 잘 알았던 김일성이 바로 눈앞에 보여서 그를 뽑았는데, 김일성이 아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던 것을 다시 말씀드려요.” (파냐 샵시나와 한 인터뷰, 1990년 1월 23일) _ 129쪽, “김일성 옹립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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