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 행성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현재 천체의 운동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이에 대해 최초로 과학적 설명을 한 사람은 철학자 엠마뉴엘 칸트다. 뉴턴의 역학에 심취했던 칸트는 ‘일반 자연사와 천체이론’이란 제목의 학위논문을 쓸 정도로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755년에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적용해 태양계가 어떻게 형성됐는가를 보이는 성운설을 제안했다.
---「태양계의 형성」중에서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기원전 270년경 처음으로 태양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그는 태양까지의 거리가 적어도 수백만km 이상이어야 하고 태양의 지름은 지구 지름의 7배쯤이라고 결론 내렸다. 아리스타르코스의 계산은 비록 오늘날 얻은 값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었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의 계산과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주장은 곧 잊혀졌다. 왜냐하면 지구의 운동은 느낄 수 없었고, 사람들은 태양이 완전한 천상계에 속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태양은 숭배의 대상일 뿐 탐구의 대상일 수 없었다. 달 아래의 지상계는 변화하는 불완전한 세계였지만 천상계는 변화가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그 천상에서 태양은 완전성을 보여 주는 신의 모습이었다.
---「완전한 세계, 태양」중에서
1959년 레이더 관측 장비가 동원되자 혼란스러운 정보가 나왔다. 구름을 뚫고 나온 전파의 잡음은 금성 표면이 매우 뜨겁다는 사실을 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표면이 아니라 대기가 뜨겁다는 식으로 관측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미국 시카고대의 젊은 과학자인 칼 세이건은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효과를 이론으로 제시하며 뜨거운 금성의 모습을 주장했으나, 이런 주장은 SF소설 정도로 여겨졌다. 금성에 대한 최초의 우주탐사는 1961년 옛 소련이 시작했지만, 탐사선의 성능이 변변치 못했던 탓에 1965년까지 14회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다. 이 틈에 어부지리로 미국이 금성 탐사에 최초로 성공했다. 1962년 마리너2호가 발사 4개월 뒤, 무사히 금성에 근접해 간접적으로 금성의 온도를 측정했던 것이다. 결과는 놀랍게도 400℃ 이상. 하지만 옛 소련 과학자들은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옛 소련은 자체 관측으로 금성의 온도가 60~80℃ 정도이며 기압은 지구의 5배를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심지어 석유의 바다로 덮여 있을 것에 대비해 가라앉지 않는 착륙선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작된 베네라4호는 1967년 금성 표면에 착륙을 시도하며 신호를 보내왔다. 측정한 최고 온도는 270℃였다.
---「뜨거운 지옥 행성」중에서
다음날 드디어 로봇 팔로 화성 토양의 첫 삽을 떴다. 지구의 과학자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흙을 퍼 올린 땅에 남은 7~8cm 깊이의 흔적에 ‘도도’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 그런데 도도를 다시 보니 그곳에서도 하얀색 물질이 보였다. 그래서 옆 부분을 한 번 더 퍼 올렸다. ‘골디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곳에서도 하얀색 물질이 보였다. 물질이 얼음인지 궁금해 퍼 올린 흙을 분석기에 담기 전에 자세히 살펴봤다. 지구의 흙과 겉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하얀색 물질이 섞여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까. 흙의 일부에 광학현미경을 들이댔다. 머리카락 지름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미립자부터 다양한 입자들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적어도 4가지 광물을 구별할 수 있었지만 하얀색 물질이 얼음 알갱이인지 소금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았다. 흙을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6월 6일 흙을 4번 분석기에 담았다. 아뿔싸.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흙은 분석기 통 안에 들어가기 전에 지름 1mm까지 걸러내는 체를 통과하게 돼 있는데, 흙의 점성이 생각했던 것보다 커서 체를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얀색 물질, 얼음인가 소금인가」중에서
물론 본격적인 탐사는 목성에 도착한 뒤 시작됐다. 갈릴레오는 도착 후 23개월 동안 목성 주변을 11회 돌면서 ‘주요 미션’을 수행했다. 목성의 4대 위성 중 하나인 가니메데에 4회, 칼리스토와 유로파에 각각 3회씩 가까이 접근했다. 이때 NASA의 보이저1호와 2호가 1979년 목성을 지나가는 동안 접근했던 것보다 100~1000배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각 접근시기마다 갈릴레오가 각 위성의 표면과 특징을 얼마나 자세히 관측하고 촬영했는지 1주일의 탐사가 끝나면 탐사선의 기록장비가 꽉 찼다. 이 자료를 지구에 보내기 위해서는 다음 1~2달이 걸릴 정도였다.
---「갈릴레오, 목성 대기에 자폭한 이유」중에서
천왕성의 고리는 재미있게도 보이저가 지구를 떠나기 직전인 1977년에 우연히 발견됐다. 천왕성 뒤쪽을 지나는 별빛을 이용해 천왕성의 대기를 관측하던 중 별빛이 천왕성에 가까워질 때 갑자기 어두워지는 현상이 발견됐다. 곧 이것이 매우 어두워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던 고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방법으로 지상에서는 9개의 고리를 발견했다. 여기까지가 지상관측을 통해 밝혀낸 천왕성의 모습이다. 지구와 탐사선의 방대한 거리, 우주잡음보다 미약한 탐사선의 전파, 탐사선의 잦은 고장, 매우 희미한 태양빛, 서서히 줄어드는 전력 등 탐사선을 가로막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보이저2호는 1986년 1월 24일 천왕성에 약 8만km까지 접근해 4300여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나침반 믿을 수 없는 이상한 나라」중에서
1781년 3월 독일계 영국 천문학자인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하자 이 숫자배열은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토성 밖에서 태양을 돌고 있던 새로운 행성 천왕성이 바로 이 수열이 예측하는 바로 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티티우스-보데 법칙은 보데의 육감 차원을 넘어 정말 타당성이 있는 사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미스터리한 배열에 아무런 이유 없이 행성들의 거리가 맞아 들어간다는 점이 더욱 미스터리했던 탓이다. 천왕성의 발견으로 태양계의 행성의 숫자는 7개로 늘었다. 이에 대해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헤겔은 다른 사물, 예를 들어 인간의 머리에 존재하는 구멍의 수가 7개뿐이기 때문에 행성의 숫자도 7개뿐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은 약간 황당해 보이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화성과 목성 사이에 행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발견 후 6주 만에 잃어버린 새 천체」중에서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과학연구부 최영준 박사는 “더 작고 어두운 천체를 찾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 노력의 부산물로 태양계 외곽에 있는 소천체인 카이퍼 벨트 천체(KBO)도 많이 발견했다”고 밝혔다. 작은 소행성이나 멀리 있는 KBO나 똑같이 어둡게 보인다. 사실 2006년 행성 자격을 박탈당한 명왕성도 KBO 중 하나다. 카이퍼 벨트는 소행성대와 모양이 비슷하지만 해왕성 궤도 바깥으로 폭넓게 위치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암석과 금속으로 구성된 소행성과 달리 KBO는 혜성처럼 얼음과 먼지로 이뤄져 있다. 카이퍼 벨트에서 불안정한 궤도를 돌던 천체 중 일부가 200년 이하의 주기로 태양에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지는 혜성(단주기 혜성)이 된다.
---「단단한 소행성, 무른 혜성」중에서
우주생물탐사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태양계의 방랑자 ‘혜성’이다. 지구생명의 기원을 밝혀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976년에 영국 카디프대 수학 및 천문학 교수인 찬드라 위크라마 싱헤와 프레드 호일이 처음 주장한 ‘외계생명체론’에 의하면, 태양계의 형성 초기에 지구 주위를 떠돌던 혜성이 지구를 방문했고, 이 방문에 지구 생명의 기원이 되는 ‘원시생명체’ 조상이 동행했다고 한다. 태양계의 탄생 초기에 지구로 날아온 ‘더러운 눈뭉치’에 뭍은 우주먼지 입자에는 탄소와 물이 함유돼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인체를 구성하는 필수단백질인 아미노산 같은 분자들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우주에서 찾는 생명의 기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