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왜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써야 했을까?
정약용은 무덤 속에 묻었던 글에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다산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의 인생을 정리한 글, 자찬묘지명
정약용의 마지막 고백으로
그와 정조의 시대, 그리고 그의 삶에 다가가다
허름한 방에 초로의 사내가 앉아 있다. 한때 그는 어디서든 중심에 서 있는 게 당연했다. 한국에서 논문에 가장 많이 인용된 철학자였고,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올린 공학자였다. 마흔에 이미 국무총리까지 지낸 유능한 관료이기도 했다. 하지만 빛나던 순간은 찰나와 같았고, 추락은 길었다. 그는 이십 년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다음에야 세상으로 돌아왔다. 갇혀 지낸 생을 꼽아보니 삶의 3분의 1이나 차지했다.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 머리카락이 많아진 그는 더 이상 천재도 무엇도 아니었다. 다시 만난 바깥 또한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젊은 사자와 같았던 동지들은 옛사람으로 사라졌다.
과거는 마치 어제와 같은데, 고개를 돌려보니 육십이다. 환갑을 맞았지만 감히 자신의 예순한 번째 생일이 기념되리라 기대하지 못 한다. 대신 그는 낡은 정장 차림으로 홀로 앉아 오래된 카메라 앞에 앉아 있다. 그는 환갑을 맞아 자신의 영정을 스스로 촬영하고자 한다. 그는 그 기록에 무엇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정약용이 남긴 자신의 삶, 〈자찬묘지명〉
대중교양서로 최초 소개!
《정약용의 고해》는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을 지금 여기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새로 풀어쓴 결과다. 〈자찬묘지명〉이란 스스로 쓴 자신의 묘지명으로, 정약용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인 글이다. 그동안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은 독자들이 다가갈 수 없는 전문서나 또는 여러 유언/묘지명을 엮은 책에 요약되어 공개된 게 전부였다. 《정약용의 고해》는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가운데 집중본을 대중교양서로서 최초로 소개하는 시도다.
그렇다면 ‘정약용 지음 신창호 옮김’으로 표기해야 하나 이 책은 ‘신창호 지음’으로만 설명된다. 선비가 쓰는 글의 참뜻은 글줄이 아니라 행간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자찬묘지명〉을 충실히 번역하고자 시작된 글은 한 선비가 죽음을 직시하는 순간까지 행간에 감춰뒀던 말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지은이와 옮긴이의 목소리가 겹쳐지게 되었다. 저자와 비슷한 연배에 이른 정약용의 고백에 저자가 동화된 것이다. 그만큼 정약용이 직접 들려주는 그의 삶은 굴곡지고 먹먹했지만, 누구나 깊이 공감할 만한 생의 절절함이 있다. 이제부터 또 다른 정약용들을 위해 정약용이 남긴 고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나의 삶을 연민한다”
고해苦海에서 고해告解하다
그래도 우리는 정약용을 모른다
정약용은 익숙한 이름이다. ‘다산학’이라고 지칭되는 빼어난 학문적 성취를 거둔 유학자이자, 성호 이익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실학자다. 화성 축조에 참여한 공학자였고, 정조에게 상방검을 받은 비밀공작원이기도 했다. 법의학자이자 수사관이었으며, 40대에 이미 정승에까지 오른 관료였다. 그리고 천주교 배교자로, 혹은 독실한 천주교도로 엇갈리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격정이자 혼돈이었으며, 18세기 조선 그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중문화에서 수없이 변주되고 있다. 심지어 조선의 셜록 홈즈로 그려질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정약용’들을 보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그의 저술은 대부분 말년에 이룬 성취다. 정약용은 일흔다섯 해를 살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정약용의 얼굴은 30대, 정조와 함께 활동했던 극히 짧은 시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조차 중년 무렵에 이뤄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정약용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네 얼굴이 있다. 강퍅한 인상을 가진 작자 미상의 초상, 무속적 색채가 짙은 초의선사가 그린 초상, 단아한 인상의 장우성 화백 표준 영정, 신지식인과 같은 모습의 김호석 화백 새 영정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자신이 외가의 피를 진하게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외조부는 우리에게 귀기 서린 초상으로 알려진 윤두서이다. 실제로 그는 20년 가까운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정도의 강골이었다. 어쩌면 정약용은 상상과는 다르게 선이 굵은 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약용이 세상을 떠난 지는 올해(2016년)로 세 갑자(180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천 년 전 사람인 것처럼 자신이 남긴 수많은 흔적들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그래서 정약용은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한 ‘문제적 인간’이고, 수다쟁이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우리는 그의 삶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정약용은 회갑을 맞아 자신의 고해와 같은 삶을 스스로의 목소리로 정리해 남겼다. 《자찬묘지명》이다. 이 책은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 정약용 본인이 직접 들려주는 정약용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정약용은 왜 자찬묘지명을 썼을까?
‘자찬묘지명’은 스스로 쓴 자신의 묘지명을 가리킨다. 묘지명은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써주는 것이 관례다. 그래서 자찬묘지명은 묘하다. 자서전도, 유언도 아니지만 그 모두를 포함한다. 예부터 선비들은 삶을 새롭게 정돈하고자 할 때 죽음을 직시하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럼에도 ‘자찬묘지명’이 마치 정약용의 글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그의 개인사가 곧 18세기 조선사를 관통하기 때문이고, 그의 자찬묘지명 자체가 가진 독특함이 두드러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속삭이듯 써내려간 솔직함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리에서조차 끝내 삼켜야 했던 말과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들 사이에서 맴도는 번민까지 그대로 드러냈다.
그가 자찬묘지명을 썼던 다른 선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그의 처지일 것이다. 환갑에 이르러서야 유배지에서 돌아온 그를 다독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묘지명을 기대하는 것도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그는 환갑잔치 대신 자신의 영정을 셀카로 찍는 초로의 노인과 같았다. 정약용은 어떤 심정으로 스스로의 묘지명을 적어 내려갔을까.
고해를 건너는 생의 독백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정약용의 호는 ‘다산’이다. 강진에서 그가 거했던 곳의 이름 또한 다산초당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서는 다산초당에서의 시간이 그저 지나가는 식으로만 짧게 언급되었다. 그가 《자찬묘지명》을 썼을 때가 예순이었으니 다산초당에서의 시간은 그의 인생에서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인 글에서 무심한 척 그때를 흘려보낸다. 대신 아주 짧은 기간이었던 정조와의 교류를 비중 있게 다룬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예뻤던 그때를 수없이 반추하며 모진 시절을 버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의 학문을 일컬어 ‘다산’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바탕이 된 저술들을 묶은 다음 정약용 스스로는 ‘여유당’전서라고 이름 붙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정약용을 지금 여기로 소환할 수 있다면, 정약용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할까. 정약용은 이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자찬묘지명》에는 간접적으로 그 심정이 드러나 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지은 호인 여유당은 《도덕경》에 나온 “여혜與兮, 약동섭천若冬涉川, 유혜猶兮, 약외사린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으로, 겨울에 살얼음 냇가를 건너듯 삼가하고 두려워하라는 의미다. 여기서 두려워하라 함은 역설적으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진정으로 두렵다면 냇가를 가로지르지 못 하기 때문이다. 두렵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수밖에 없는 발걸음, 나아감에도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 정약용은 차밭에서 시절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을 때의 용기를 고백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에게 보내는 고해성사
“그럼에도 어제를 딛고 내일을 살아가리라”
그렇게 살얼음판을 걸으며 생의 한 갑자를 버틴 이가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면 이런 심정일 것이다. 바로 스스로에게 건네는 고해성사이다.
고해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고백과 연민, 그리고 용서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밝힌다.
“내 나이 예순이다. 나의 인생, 한 갑자甲子 60년은 모두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려고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대개는 그 무게에 짓눌려서 적당히 외면하게 된다. 정약용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다음, 반생 가까이 흘려보낸 삶이 억울하고 또 헛돈 생은 아니었을지 의심이 갔을 것이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삶의 의미를 간절하게 찾으면서도 그런 의심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반생 가까이 갇혀 지냈던 자신의 삶에 용서를 구하며 다독인다. 정약용은 정조와의 추억을 비중 있게 다루지만, 그렇다고 남은 삶을 버티기 위해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과거와 그리운 친구들을 소환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임금님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동화처럼 끝내지 않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집요하게 소개하며 그 이후에도 꾸역꾸역 나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긍정했다. 그렇게 고해苦海를 건넜으면서도, 그럼에도 남은 생에 최선을 다하고자 어떤 원망도 냉소도 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에게 고해告解성사를 했다.
그래서 이 책은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을 새롭게 풀어낸 결과이지만 정약용의 묘나 죽음과 관련된 사진은 단 한 장도 일부러 삽입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무덤에서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징비록》, 《한중록》에 이은
정약용이 직접 전하는 생생한 그때의 역사
이 책은 인물사로서 18세기를 조망하는 데에도 탁월한 성취가 있다. 먼저 정약용의 삶을 《자찬묘지명》을 통해 들여다보면 당대 인물들이 모조리 소환된다. 앞서 밝혔듯이 그의 외증조부는 윤두서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윤선도가 나온다. 그의 자부는 조선 최초의 신부인 이승훈이며 다시 이가환, 성호 이익과 연결된다. 채제공과는 사돈지간이 되며 혜경궁 홍씨와는 배우자의 집안과 연결된다. 〈황사영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은 그의 조카사위다. 그 스스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받았으며 정조의 눈이자 칼로 활동했다. 화성 행차에서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이들과 얽히면서 그가 겪은 크고 작은 사건들은 하나 같이 18세기 이후의 한국사 방향을 결정지은 굵직한 역사들이다. 이를 정약용이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고, 자신의 입으로 전한다. 《난중일기》나 《징비록》, 《한중록》 못지않은 개인의 역사 증언인 셈이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된 천주교와 관련된 언급들도 있다. 그는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이 천주학에 관심을 가졌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상당 부분을 자신이 어떤 유학 경전을 읽었으며 어떤 저술활동을 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시절이 엄혹했기 때문이라고만 보기에는 그가 남긴 공부와 집필의 흔적들이 간절하다. 유학을 공부하고 저술활동에 몰두하는 데에서 유배지에서의 공백을 메우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가 《자찬묘지명》을 통해 스스로를 유학자라고 선언했다는 것이 이 책이 품은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저술에 대한 재미있는 언급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목민심서》가 세상 사람들에게 확대해석되어 크게 평가받는 것을 경계한다.
그때를 살았던 정약용이
지금을 사는 정약용들에게
우리 모두는 후회 없는 삶을 꿈꾸지만, 삶이란 뒤돌아 하는 후회의 연속이 쌓이고 쌓인 것이다.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은 이러한 미련을 인정하고, 자신의 역사와 화해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삶에 있어 스스로에 대한 죄인이고, 또 다른 정약용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용기 있게 직시한 다음 스스로에게 털어 넣고 용서를 구하는 고백과, 오늘까지 잘 버텨왔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다독이는 화해가 아닐까 한다. 마치 환갑의 정약용처럼 말이다.
이 책이 오늘을 힘껏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