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담배’를 손에 쥔 이다선 어무이를 만난 곳도 이 완행여객선 안이었다. 살아생전 울 어무이도 라일락 담배를 즐겨 피셨다. 덕분에 담배 심부름을 참 많이도 다녔다. 9살 아들을 두고 꽃다운 나이 40대에 너무도 일찍 돌아가신 울 어무이 생각이 났다. “왜 라일락 담배를 피세요?” “제일 싸서 핀다.” 라일락 담배만 피시는 이유를 묻자, 이다선 어무이가 해주신 대답이었다.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시던 울 어무이. 답답한 속은 풀어야겠고, 돈은 아껴야겠으니, 싼 담배만 사서 피우셨구나. 어린 아들은 그걸 몰랐다. ‘라일락 담배’ 이다선 어무이를 몇 번 더 여객선에서 뵈었다. 마땅한 숙소도, 식당도 없는 좌도에서 “묵을 곳, 잘 때 없시모 언제든 우리집에 오이라”하고 반겨주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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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무이, 좌도에는 농사를 주로 뭐로 지었십니까?” “저 앞에 솔섬 보이제? 소를 배에 싣고 농사를 지으러 다녔제.” 한창 밭일을 하시던 공달수 어무이와, 뭍으로 매실을 부치던 구연학 어무이께서 맞은편 솔섬松島, 송도 농사 이야기를 꺼내신다. “소가 배에 탈라 쿱니까? 바닷물을 무서버 하낀데예?” “잘 안타지. 그래도 다 방법이 있제.” 어린 송아지를 먼저 배에 태우면, 모성애로 어미소가 얼른 배에 오른다. 다른 방법으로 “워~워~워~” 소리를 내면서, 소가 스스로 못 긁는 사타구니 사이를 쓱쓱 긁어주면 시원해하다가 어느새 배에 올라타 있다.
“욕심을 내면 안 되는데, 큰 전복을 보면 욕심이 안 나나. 자기 숨 남은 생각은 안 하고 전복 따는 데만 정신이 팔리는 기라. 그라다가 마지막 숨을 쉬는 기라.” 미역을 따던 제주 해녀들은 이제 시금치밭에서 시금치를 다듬는다. 비진도 주변 바닷속에 지천으로 널렸던 해산물이 잘 나질 않는다. 게다가, 어느새 청춘은 가고 할머니가 되어 물질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빗창으로 전복을 따듯, 시금치를 다듬는 손길이 능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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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라, 산더미처럼 큰 배가 오더만은, 아버지 친구인 강명준 어른 논 앞에 대는 기라. 큰 주딩이가 턱하고 벌어지대. 불도저가 계속 내리오더라꼬. 논이고 밭이고 싹 다 밀어붙이면서 산 중턱에까지 여러 갈래 길을 만드는 기라.” 대형수송선인 LST(Landing Ship Tank)에서 쏟아져 나온 건설장비들은 몇날 며칠을 끊임없이 길을 내고 또 냈다. 게다가 철조망을 둘러치기 시작했다. 한겹, 두겹, 세겹…. 철조망이 늘어날수록 정현권 소년의 불안감도 자꾸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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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바다 한 가운데서 지칫바람을 만난 기라. 파도는 배 위로 자꾸 넘어 올라오고, 배는 물 밑으로 자꾸 들어가고…. 딱 죽게 생겼더라꼬. 바람이 앞바람인데, 배가 한치 앞으로 못나가. 정신을 바짝 차맀지. 뱃머리를 바람 방향에서 비스듬하게 하니, 조금씩 옆으로 가져.” “구산면 어느 섬인지도 모리겄다. 멸치 잡는, 권현망 큰 배들이 바람을 피해서 쉬고 있더라꼬. ‘아이고, 그 바람에 우찌 살아왔십니까?’ 하더라꼬. 그제야 살아난 게 실감이 나더라.” 그날 하루뿐만이 아니다. 괭이바다를 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추봉도와 마산 장을 수십 년 장배로 오고 갔다. “우리 자슥들, 딸 셋, 아들 둘 모두 대학 공부를 시켰다. 해초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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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종이섬에는 미더덕 양식어업이 꽃을 피우고 있다. 종이섬 갈바지마을 주민들 절반 이상이 “돈 버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미더덕 양식이 대유행이다. 마을 앞바다에는 미더덕을 키우는 하얀 부자가 수없이 떠 있다. 김성찬 갈바지마을 이장은 종이섬 미더덕 양식의 선구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효자 수산물인 미더덕이 처음에는 천덕꾸러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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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곤리도에서는 여자가 자무질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전적으로 남자들이 그 역할을 도맡았다. “남자들이 숨을 더 오래 참는다 쿠데. 우리 아부지도 한번 물 속에 들어가모 질게는(길게는) 3분 이상을 참고, 전복을 따셨다 카대.” “해녀하고 똑같네요?” “하모. 그라니까 제주도에 해녀가 있다쿠모, 우리 곤리도는 해남이 있던 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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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기 어선 20척을 운영하는 모항母港 연대도는 그야말로 부자 동네 ‘돈섬’이었다. “광복 직후에 우리나라에 큰 공장이 있나, 뭐시 있노? 잠수부는 큰 기술이 있어야 하지만 선원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 20척 배에 7~9명씩 선원이 필요하잖아. 전국에서 젊은 사람들이 몰리 들었지. 전부 연대도로 돈 벌러 왔지. 그래서 ‘돈섬’이라고 불맀어.” 200명 이상의 선원들이 연대도로 몰려들면서, 선창에는 술을 파는 술집이 7~8개 생길 정도로 흥청거렸다. 혈기 넘치는 젊은 선원들은 색시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싸움질도 곧잘 일어났다. 보다 못한 연대도 사람들이 ‘자체 통금시간’을 정할 정도였다. “그때 주로 뭘 잡았습니까?” “홍합이지. 홍합. 참홍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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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처럼 첫 뽀뽀 이야기에 수줍어하는 어무이, 딸을 낳아놓고 당신처럼 힘들게 살까봐 맘껏 좋아하지 못했다는 어무이, 21살 어린 나이에 시댁 식구 아홉 명 밥을 해대느라 세월 다 보낸 어무이, 기다리던 손주 전화에 아픈 무릎은 잊고 한달음에 부산으로 달려간 어무이, 10년 만에 친정을 갔더니 ‘어머니가 처녀적 사이즈로 노란 예쁜 원피스를 사놨더라’는 어무이…. 달다방 프로젝트는 섬마을 어무이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두 가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걸 어무이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야기로 연극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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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릴 때는 몰랐지. 어무이가 왜 치마를 입고 다녔는지. 속이 넓은 한복 치마라야 돈을 넣은 전대를 둘둘 말아서 허리에 차도 표시가 덜 났으니까. 화장실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전대는 절대 안 풀어.” 섬 사람들한테 톳이며 미역, 우뭇가사리를 사고, 가격을 흥정하기 위해서는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마셔야 했다. 그러면서도 전대에는 큰돈이 들었으니, 안심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어떤 톳이 좋은 지도, 얼매나 가격을 믹이야 할지도 몰랐지. 차츰 차츰 어떤 물건이 좋은지, 어떤 물건은 사모 안 되는 지를 경험으로 알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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