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이 되어 한 직장에서 25년 동안 조직의 일원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30~40대에는 북아프리카 건설 현장에서만 10년 넘게 근무했다. 노력한 만큼 성과도 있어 나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즈음 ‘중년의 방황’인 사추기(思秋期)가 시작되었다. 언제까지 계속 이대로 가야만 할까? 지금 이 모습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인가?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 제대로 해보고 죽어야 하지 않나? 밤하늘 별똥별을 보며 빌었던 어린 시절의 꿈은 다 어디로 갔나?
엉킨 실타래 같은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했다.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나를 얻기 위해 둘을 버려야 함은 인생사의 자명한 이치. 무엇보다 꿈을 실현하는 것이 인생길에서 결코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
나이 오십 줄에 꿈을 좇아 자전거 세계여행으로 삶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꿈은 꿈을 낳는다. 그 꿈을 통해 타자의 인생관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인생이다. ‘조직’은 떠났지만, 인생 후반전도 멋지게 장식하고 싶다. 나는 두 번 태어났다. 한 번은 어머니 자궁에서, 또 한 번은 여행을 통해서.
--- 「삶의 전환점, 꿈을 향한 도전이다!」 중에서
역사기념관을 찾았다. 붉은 벽돌조의 당시 해군사령부, 군 형무소 등은 현재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념관장을 만나, 당시 발틱함대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출정의 변’이나 함대 발진 상황 등을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무척 냉소적이었다. “잘 알면서 왜 물어보시나? 그때의 달콤한 추억을 되새기려 왔나보네요.”
아, 나의 불찰임을 즉시 알아차리고 “나는 야뽄스키가 아닌 서울에서 온 카레이스키입니다” 하며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는 자전거 여행 루트와 여행 목적 등을 말했다. 그때서야 관장의 눈길이 따뜻해지며 “당신을 일본에서 온 역사학자로 알았어요. 당시 한국과 라트비아는 같은 처지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다음 말에 나는 또다시 착잡해지고 말았다. “내 기억으로는 당신이 이곳을 찾은 최초의 한국 사람이에요.”
117년 전 조선의 운명을 결판냈던 역사 현장에 어찌 내가 처음이란 말인가!
--- 「“달콤한 추억을 되새기려 오셨나요?”」 중에서
‘홀로 여행’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지독한 외로움이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다니는 일곱 개의 짐가방보다도 더 무겁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강렬한 생존의지가 발동한다. 이것이 동시에 태생적 욕구인 리비도를 끌고 나온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더라도 역 주변에 예외 없이 ‘꽃집’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리라….
그녀가 싱글이라서일까, 이방인의 심금을 건드리는 친절 때문일까. 어느 순간 그녀가 ‘티벳 영혼의 구도자’ 같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섹스의 쾌감보다 더 큰 희열과 충만함을 느꼈다. 외로움을 정신적으로 극복할 때야말로 ‘홀로 여행’의 의미가 더 깊어지고 충만해짐을 깨닫는다.
그녀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 「티벳 영혼의 구도자」 중에서
“두 팔 들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발틱웨이 마지막 여정에서 평화와 화합의 ‘인간사슬’ 몸짓을 하는 중이죠.”
궁금해하는 커플에게 발틱웨이 조형물의 역사를 말해주었다.
“아, 그래요? 지금까지 몰랐던 이야기를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그 커플은 손을 맞잡으며 “우리 부부는 손에 손을 맞잡은 1989년 8월 23일 그날의 의미를 생각하며 평생 살아갈 것”이라고 내게 약속했다. 그리고는 “코리아도 어서 빨리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란 말을 빼놓지 않았다.
발틱웨이 여정의 끝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지구촌 어느 나라, 어느 누구라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 한국에 대한 평화를 기대하고 있다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향한 간절한 염원으로 독립을 이룬 ‘발틱웨이’. 이번 여행은 그 어떤 곳보다도 가슴 저미는 여정이었다. 내가 이 길을 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인간의 감동은 어떤 무력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해준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8천만 민족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이역 땅, 낯선 하늘 아래에서 무수한 땀방울을 뿌리며 페달을 돌렸다.
--- 「‘발틱웨이’ 여정을 마무리하며」 중에서
이튿날 아침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붉은광장. 국립역사박물관 옆 ‘부활의 문’을 통해 들어섰다. 동화 속 궁전 같은 둥근 돔의 성 바실리 성당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왼편으로는 고풍스런 ‘굼’ 국영백화점 건물, 오른편에는 길고 높은 벽 안에 크렘린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첫인상은, 내가 돌아본 세계 어떤 나라 광장보다도 아름답고 웅장하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조화 때문일까? 과거 첩보영화 〈007 위기일발〉, 〈007 살인번호〉 등 지령을 내리던 ‘악의 축’의 어두운 이미지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사실 이 광장의 원래 이름은 내 첫 느낌 그대로 ‘아름다운 광장’이었다. 공산주의 상징이나 러시아 국기의 붉은 색깔에서 유래된 이름이 전혀 아니다. 한마디로 영어 ‘Red Square’를 그대로 직역하여 고착되어버린 것이다. (……)
자전거로 73,000m2 드넓은 광장을 몇 바퀴 돌아보았다. 고르지 못한 돌바닥이라 천천히 페달을 돌렸다. 바닥에 큰 대자로 누워 하늘도 보았다.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벅찬 감회가 밀려왔다. 어릴 적부터 무수히 듣고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보아왔던 곳, 여기서 태극기를 달고 자전거를 탄다는 것, 그땐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 「붉은광장에 태극기를 휘날리다!」 중에서
문을 열고 들어서니 푸시킨이 생애 마지막으로 앉았던 창가 4인용 ‘바로 그 자리’가 비어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덕인가…. 가슴이 뭉클해졌다.
누군가 방금 식사를 끝낸 듯 웨이터가 그릇을 치우려 하고 있었다. 누가 볼세라 정말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가 그 자리에 앉고는 웨이터에게 얼마간의 팁을 건넸다. 그러자 웨이터는 빠른 손놀림으로 그릇을 치워주었고, 기념사진도 여러 각도에서 잡아주었다.
뒤이어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듯 계속 흘겨보며 줄을 섰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제일 비싼 ‘코스요리’를 시켜 50여 년 만에 찾아온 행운의 시간을 만끽했다.
‘아버지, 당신이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그 자리에 제가 왔습니다!’
먹먹함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랜 숙제를 푼 듯, 홀가분함과 그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자전거 세계여행을 시작한 이래 가장 가슴 뿌듯한 감동의 시간이었다.
--- 「그가 마지막 앉았던 자리」 중에서
나는 학창 시절 성적도 별로 안 좋았고 결점도 많았지만, 장점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매사에 호기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호기심은 관심을 부른다. 관심이 생기면 관찰을 하게 된다. 관찰을 하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
“이걸 바꾸면 좀 더 신나고 재미나게 할 수 있을까?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화할까? 아프리카는 과연 ‘존재’하며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한 번뿐인 인생을 멋지게 살라고 창조자가 나에게 내려준 선물이 호기심이고, 그것은 내 삶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 호기심 때문에 지금도 세상을 두 바퀴로 누비며 다닌다.
아프리카 부임 당시, 멘토 아문센과 관련된 ‘호기심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더운 수도로 알려진 카르툼. 그곳 여름철 평균기온이 섭씨 42도! 그 혹서를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이것이 일보다 더 심각한 나의 고민이었다. 그때 아문센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남극 탐험을 앞두고 겨울 내내 창문을 열고 팬티만 입고 잤다. 혹한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나는 역발상으로 그해 여름 내내 겨울 내복을 입고 출근했다. 현지 부임 무렵 “사람이 이상해졌다, 독하다” 등의 소문이 돌았지만 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진 않는다며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해외 자전거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당시 수단 출국을 앞둔 ‘여름 내복’의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야만 힘든 자전거 여행에서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귀국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호기심 천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