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를 이어온 중국에서는 당연히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전쟁이 있었다. 상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보면 중국 역사는 전쟁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전쟁이 많았다 해도 모든 전쟁이 다 똑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이른바 시대의 한 획을 긋는 큰 의의가 있는 전쟁이 있는가 하면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그저 그런 전쟁들도 있다.
---「머리말」중에서
아울러 황제와 염제의 싸움 못지않게 언급되는 것이 황제와 치우의 싸움이다. 쓰마쳰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치우가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고 난을 일으키자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해 줘루의 들에서 치우와 싸워 마침내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하였다. 곧 황제가 염제와의 싸움을 끝낸 뒤 치우와도 싸워 그를 죽였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현재로서는 고구할 길이 없다. 혹자는 치우가 황제와의 싸움에서 패한 뒤 남쪽으로 쫓겨 가 남방 소수민족의 시조가 되었다고도 한다.
---「신화 전설시대의 전쟁, 반취안의 전쟁」중에서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투에 동원된 양쪽 군사의 수는 은이 70만 명이고, 주가 4만 8천 명으로 은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미 국운이 다해 가는 은나라 군사는 수적으로는 많았으나, 모두 싸울 마음이 없었다. 다만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터라 은의 군대는 모두 병기를 거꾸로 돌리고 무왕을 위해 길을 열어 주었다. 이에 무왕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은의 병사는 모두 붕괴되어 군주를 배반했다. 궁지에 몰린 주왕은 녹대 위에 올라가 보석과 옥으로 치장한 옷을 뒤집어쓰고는 스스로 불을 질러 타죽었다.
---「천명을 바로세우다, 무예의 전쟁」중에서
춘추와 전국시대는 한마디로 전쟁의 시대라 할 만하다.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서로의 이권 다툼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표면상으로는 “각국의 군주들은 하늘 앞에서 피를 마시며 맹약을 맺음으로써 공식적으로는 우호관계를 서약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맹약은 수시로 깨졌다. 다양한 이유를 앞세워 각국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좌전』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722부터 463년 사이인 259년 동안 500회가 넘는 전쟁과 100회가 넘는 내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 역사에 등장한 위진남북조라는 또 다른 동란기가 있기는 하지만 각축을 벌였던 나라의 숫자만 놓고 본다면, 동주 시기는 중국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 동란기라 할 수 있다.
---「패업을 완성하다, 청푸의 전쟁」중에서
육국의 합종책에 대항해 나온 것이 연횡책連橫策 또는 연형책連衡策이다. 이것을 주장한 이는 장이張儀(장의)인데, 그 역시 젊어서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신을 써 줄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기원전 328년에 진秦의 혜문왕에게 발탁되어 재상이 되자 진을 제외한 나머지 육국을 설득해 진과 동맹을 맺는 연횡책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겼다. 장이는 먼저 위魏왕을 설득해 합종책의 한 귀퉁이를 허물고, 다시 뛰어난 외교 전술로 초楚를 농락해 연맹에서 이탈시켰으며, 이어 한과 제, 조, 연을 설득해 마침내 연횡책을 완성했다. 이들 쑤친과 장이에 대한 이야 기는 후세에 많은 사람에 의해 회자되면서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천하통일로 가는 길목, 창핑의 전쟁」중에서
천하는 말 그대로 군웅할거의 각축장으로 변해 버렸고, 중원 땅에서는 군벌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이후 12년 동안 격렬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약 5, 6년간의 분열과 병합의 과정을 거친 뒤 전국은 수많은 군웅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위안사오는 지저우冀州(기주), 칭저우靑州(청주), 빙저우幷州(병주)를 차지했고, 차오차오曹操(조조)는 옌저우?州(연주), 위저우豫州(예주)를 점거했으며, 궁쑨짠公孫瓚(공손찬)은 유저우幽州(유주)를, 쑨처孫策(손책)는 강동江東에 할거했다. 그 와중에 황건적 잔당 역시 지역을 옮겨 가며 싸움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이들은 오래지 않아 군웅들에 의해 진압되거나 그들의 군대에 편입되었다.
---「『삼국지』의 삼대 전투」중에서
페이수이의 전투 이후 남북은 어느 쪽도 상대방을 압도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589년에 수 문제 양졘楊堅(양견)이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206년 동안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200여 년 동안 남북 양쪽은 항상 화이난 淮南(회남) 지역을 제외한 후베이의 샹양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북쪽 사람들의 기병 전술도 여기에 이르면 효력을 잃었다. 남쪽은 수군이 능했는데, 이는 전장에서의 주동적인 지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병력을 배로 이동시켜 장교와 사병이 행군하는 수고를 없앴으며, 양식을 신속히 운반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을 북진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래서 “동진 군은 유례없는 큰 승리를 얻었으면서도, 이러한 전과를 확대시키지 못한 채 창쟝의 왼쪽 땅에 치우쳐서 만족하며 편안히 지냈다”.
---「중국의 역사 공간을 확장시킨 페이수이의 전투」중에서
왕전의 위엄은 하늘을 찔렀다. 정통제는 어렸을 적 자신의 스승인 왕전을 ‘선생’이라 불렀고, 조정의 신하들도 그를 ‘옹부翁父’라 부르며 그의 비위를 맞췄다. 심지어 나라의 국방을 책임지는 병부상서 쉬시 徐晞(서희)가 그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등 그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까지 벌어질 지경이었다. 또한 왕전은 환관들이 관할하고 있던 비밀 경찰조직인 금의위를 통해 반대파를 색출해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뿐 아니라 뇌물을 받고 탐관들을 비호하거나 승진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왕전의 탐욕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심복을 변방에 파견해 중요 요새지를 점거한 뒤 둔전을 사사로이 잠식하고 병사들을 둔전 경영에 사역을 시켜, 이를 견디다 못한 병사들이 도망을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명 왕조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한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환관의 발호였다면, 그 시초는 왕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제가 포로로 잡힌 치욕의 역사, 투무의 변」중에서
영국군의 일시적인 철수를 자신들의 승리라 착각한 도광제는 9월 하순에 린쩌쉬를 파면하고 멀리 위구르 지역의 이리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치산을 전적으로 신임해 린쩌쉬 대신 흠차대신 겸 양광총독 兩廣總督에 임명했다. 신임 흠차대신 치산은 12월 초 광저우에 도착했다. 그가 임지에 도착해 처음으로 한 일은 전임인 린쩌쉬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그 사이 영국 측은 찰스 엘리엇이 단독 전권대사가 되어 원정대의 전권을 장악했다. 치산과 엘리엇은 1841년 1월에 광저우에서 교섭을 진행해 홍콩 섬의 할양과 배상금 600만 원 지급, 양국이 평등한 국교 관계를 맺는 것 등을 약속하고 촨비가조약川鼻假條約(천비가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협상 결과는 양국의 책임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중국 측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홍콩 섬의 할양’이었다. 중국의 영토를 자신과 상의도 없이 영국에 넘겨주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도광제는 치산을 양광총독에서 해임했다.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아편전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