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그가 남겨놓은 이와 같은 유수의 작품들과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당대 문단에서 그에 대한 인정이 적잖이 인색했으며 또한 그의 작품세계를 정석적인 논의로 평가해주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거기에는 그 나름의 사유가 있다. 그가 활발하게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역사 소재의 소설들과는 다른 맥락으로 현대사회의 애정 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또 하나의 중심축으로 삼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 발생한 부정적 작용이 결국은 다른 부분의 납득할 만한 성과마저 중화시켜버리는 현상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지나치게 대중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문학작품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양식의 수위를 무너뜨리는 경우를 유발하면서, 순수문학에의 지구력 및 자기 절제를 방기하는 사태에 이른 감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구체적인 예증으로 열거할 만한 작품이 너무 많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제하여놓고 살펴보자면,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 부여되었던 ‘한국의 발자크’라는 별호가 결코 허명이 아니었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자신의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엔 발자크가 있다.”라고 써 붙여 두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 오연한 기개는 나중에 극적인 재미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구성, 등장인물의 생동력과 장쾌한 스케일, 그리고 그의 소설 처처에서 드러나는 세계 해석의 논리와 사상성 등에 의해 뒷받침된다.
--- p.27~28
1963년 말 추운 겨울날에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난 이병주는, 한때 폴리에틸렌 사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야의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 천생(天生)의 작가가 사업가로 성공할 가능성이 컸을 리 없다. 그는 이후에도 1966년에 ‘신한건재’라는 기업을 경영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들 이권기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사업을 할 때의 이병주는 사장실에 앉아 글만 쓰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직원들에게는 원고료를 받아 월급을 준다고, 기다리라 했다는 것이다. 1965년 1월, 그는 다시 본업의 길을 찾아 《국제신보》 논설위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그해 6월 월간 잡지 《세대》에 중편 「소설·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함으로써 공식적이고 본격적인 작가의 출범을 알렸다.
이는 작가 자신에게는 물론, 한국문학사에 있어서도 만만찮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로 돌아가 보면 그의 데뷔작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읽고 그 독특한 세계와 문학성에 놀란 여러 사람의 글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오늘에 그 작품을 다시 읽어보아도 한 작가에게서 그만한 재능과 역량이 발견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겠다는 독후감을 얻을 수 있다. 산뜻하면서도 품위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구조, 낯선 이국적 정서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용해하는 힘, 부분 부분의 단락들이 전체적인 얼개와 잘 조화되면서도 수미상관하게 정리되는 마무리 기법 등이 이 한 편의 소설을 편만(遍滿)하게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 p.80~81
이렇게 걸출한 한국문학의 작가 이병주를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발족한 지도 벌써 스무개의 성상이 흘렀다. 2021년은 이병주 탄생 100주년, 2022년은 그 타계 30주년이다. 학병, 좌우 대립, 감옥 체험 등을 거친 그의 생애는 한국 근대사의 아프고 슬픈 여러 사건이 휘몰아친 격동의 현장이었다. 그는 이 고난의 시기를 안으로 삭이고 문필로 승화하여 탁발한 체험적 진실과 역사성을 확립해 놓았다. 그러기에 10주기가 되던 2002년부터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 그리고 많은 문학인이 그의 뜻을 기리고자 한데 모여 기념사업회를 설립, 국제문학제를 개최하고 국제문학상을 시상해 온 것이다.
2008년 4월에는 하동군 북천면 이명산길에 이병주문학관을 개관하였고, 이후 지금까지 해마다 다양한 사업과 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이병주 선집 발간은 2006년 한길사에서 중·단편집 3권과 장편소설 27권 등 30권을 발간하였고, 2021년 바이북스에서 중·단편집 1권과 장편소설 9권 그리고 에세이집 2권 등 12권을 발간하였다. 한길사의 선집은 주로 역사 소재의 소설을 위주로 하였고, 바이북스의 선집은 주로 대중적 수용력이 높았던 작품을 위주로 하였다. 이를 통해 20세기를 관통하며 한국문학에 큰 족적과 영향력을 남긴 이 대형 작가를 기념하는 한편, 우리 시대의 독자들에게 뜻깊은 소설 읽기의 분위기를 환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병주기념사업회가 발간한 도서 목록은, 이 글의 3부 ‘연보와 자료’에 따로 기술해 두기로 한다.
--- p.169~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