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계시로 비건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몇 번이나 도고한테 ‘이번’에는 사이비가 아닌지, 이상한 책은 아닌지 되물었다. 도고는 나를 거듭 안심시키면서 말했다. 유명한 책에서 읽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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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뭘 먹든 우리는 한 식탁에 앉는다.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는 각자의 자유다. 접시에 담긴 음식이 다르다고 해서 누군가가 미안하거나 불쌍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자기 먹을 것 정도는 마음대로 선택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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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벽돌집의 요리 담당은 나였다. 교환 학생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못 먹을 정도만 아니면 되는’ 요리 실력은 도고의 비건 시대를 열었다. 심심한 맛에 길들여져 있던 도고의 연약한 혓바닥은 이박표 집 밥 훈련을 받은 뒤, 웬만한 염도에는 녹슬지 않는 함선 바닥처럼 무던해졌다. 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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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꼬장꼬장하게 조건만 덕지덕지 붙인 변화 같지만, 이건 어마어마한 거다. 당근을 안 먹는 사람에서 당근을 먹는 사람이 된 거니까. 돌멩이 섞여 못쓴다던 쌀을 키질해서 골라내듯, 재료 때문에 ‘맛없다’ 꼬리표가 붙었던 음식 사이에서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발견하는 거다. 내가 왜 이 채소를 싫어하는지, 어떤 형태의 채소를 먹는지를 곰곰이 곱씹어 보면, 싫어하는 채소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 p.89
콩고기 외에도 조리 방식이나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 기존 음식 이름을 차용하는 채식 요리가 많다. 채식 버팔로윙, 채식 치킨, 채식 함박 스테이크 등 고기류 이름을 넣는 요리가 자주 보인다. 그런데 고기 소비를 줄이기 위해 시작하는 채식인데 비건 요리 이름에 고기 메뉴 이름을 붙이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비건이 고기 안 먹는 거야 당연한 건데, 이건 꼭 고기가 너무너무 먹고 싶은 사람이 대체 음식을 먹는 느낌이다.
--- p.97
도고는 ‘먹음’으로 스스로의 지향을 표현하는 비건이다. 가끔 본인의 다짐과 다른 음식을 먹게 된다 하더라도, 그게 도고가 바라는 바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타락은 더더욱 아니고.) 앞으로 계속 비건을 이어갈 도고 옆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회초리를 들고 단속하는 것도 언제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는 것도 아닌, 같이 밥을 먹는 거다. ‘먹음 표현’을 하는 도고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나는 ‘먹음 지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
--- p.101
그 천만 명이 모두 도고처럼 주변에 비건을 선언한 사람은 아닐 거다. 그 대부분이 하평 같은 사회 초년생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회사에서는 점심으로 돼지불백을 먹고, 집에서는 저녁으로 나물 비빔밥을 먹는 채식주의자. 고깃집 회식에 따라가 수저를 세팅하고 고기를 굽지만, 집에서는 콘플레이크에 두유를 부어 먹는 스파이 채식주의자! 사회에서는 가만히 숨어 있다가 채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마피아가 고개를 들 듯 스르르 채소를 꺼내는 소극적 채식주의자들이 모여 천만 채식인이 되지 않았을까.
--- p.131
비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상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나도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난 도고처럼 비건 못 해!’ 하고 자괴감을 느낄 시간에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뭘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장 비건을 시작하는 건 무리겠지만, 천천히 채식에 발 들이는 건 충분히 해 볼 만하다. 착 맞는 ‘이박 스타일 채식 라이프’를 찾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천만 채식인 중 한 명이 되었다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 p.149
치킨이 닭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후로 음식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우선 고기 선망을 버렸다. ‘닭’점에서 시작한 선이 ‘치킨’점으로 닿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탁에 무조건 고기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 없는 집착을 차차 놓게 되었다. 또,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내 돈 주고 산 음식이니까 내 맘대로 버려야지.’ 하는 마음 전에, 이 음식을 위해 희생된 동물을 떠올리게 되었다. 공장식 도축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작은 병아리에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한 마음의 10%만 치킨에서 상기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 p.155
삼겹살을 먹으러 가면 말 그대로 동물의 살을 먹기 때문에 ‘이게 돼지구나!’ 하고 연상할 수 있지만, 애벌레 롱 패딩을 입으면서 목과 가슴털을 쥐어뜯기는 오리를, 보들 폭신한 니트를 입으면서 그 울을 만들기 위해 털을 깎지 않으면 스스로의 털에 파묻혀 죽어 버릴 정도로 개량된 양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원래의 형체를 알 수 없게 가공된 동물은 죄책감 없이 소비되고 버려진다. 소, 닭, 돼지가 음식을 위해 학대당한다면, 오리, 거위, 양 그밖에 부드러운 털을 가진 다양한 동물들은 의류를 만들기 위해 학대당한다. 음식을 먹을 때만큼 우리는 입고 쓸 때에도 동물권에 대해 떠올리고 되새겨야 한다.
--- p.184
무엇이 좋다 나쁘다는 없지만, 각자에게 있어 옳은 방향은 있다.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추구할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비건이든 논비건이든, 우리는 같은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할 자유가 있다. 벽돌집 밖에서 채식을 하고 있는 모든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비건을 지향하고자 하는 논비건들을 위해.
---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