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의 GD 시리즈는 희곡의 텍스트와 그것을 해석한 시각 예술가들의 작업이 결합된 구조다. 그러니까 독자 입장에서는 희곡과 이미지 형태로 구축된 희곡의 해석, 이렇게 두 겹의 서로 다른 텍스트를 접하게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나온 GD 시리즈를 보면, 이 두 겹의 텍스트는 매 권마다 상호 보완적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텍스트의 분위기를 비구상으로 표현한 경우, 텍스트와 이미지가 나란히 서서 움직이는 경우 등 서로 다른 방식의 다양한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희곡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무대를 상상하는 한편, 이미 구성되어 있는 이 이미지들을 접하면서 나의 해석과 시각 예술가의 해석 사이의 긴장 또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상당히 능동적이고 복합적인 독서, 즉 ‘상상의 관극’ 경험을 얻게 된다.
---「작가 서문」중에서
진영 지금부터 저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이야깁니다. 예, 그렇습니다. 잘못 들어오신 겁니다. 아름답고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음악, 비디오, 퍼포먼스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야기’라니. 그것도 웬 아재의 ‘개인적’인 이야기라니. 네, 압니다. 하지만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뭐. 지금 나가신들 환불도 안 됩니다. 그건 그렇고, 자,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 p.31
도연 술… 많이 드세요?
진영 아니, 별로. 그런가?
도연 엄마가 그러던데요. 둘째 삼촌이 술만 아니었어도 지금보다 훨씬 잘됐을 거라고요.
진영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많이 마셨어.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염상섭, 존 치버, 이상, 레이먼드 카버, 이거 봐. 한 손으로는 모자란다.
도연 그분들은 다 잘… 됐…
--- p.39
진영 제가 보기에 세상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젊은이처럼 아름다운 존재는 없습니다.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손가락을 허공에 두듯이 살짝 키보드 위에 얹어두고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으다다다, 그러다가는 손가락을 멈추고 썼던 걸 읽어보면서 다시 생각. 사는 걱정 없이 저렇게 쓸 수만 있다면야 참 좋은데 말이죠. 하…생계 대책… 미안하죠. 근데 현실은 항상 미안한 거예요.
--- p.42
진영 그때 내가 들고 있던 건 아버지 약이었어. 약이 귀할 때니까, 부탁한 약이 들어왔다고 약국에서 연락이 오면 내가 가서 찾아오곤 했지. 약은 그 와중에도 계속 들고 있다가 집에 가지고 갔어.
--- p.74
진영 니 외할아버지가 그때 버스 회사를 하셨잖아. 근데 버스 회사라는 게 말만 회사지 사실은 버스 몇 대씩 가지고 있는 차주들이 모여서 하는 조합제였거든. 아버진 거기서 돌아가면서 하는 사장을 맡고 있었어. 그때 사고 처리다, 공무원들 청탁이다 해서 매일같이 이어지는 술 접대로 간이 다 망가진 거지.
--- p.75
진영 … 그날 다 같이 화곡동 가는 버스를 탔지. 화곡동.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어. 이미 퇴근 시간이 가까이 돼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꽤 많았어.
진석 너희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진수는 작은형한테 꼭 붙어서 다니고. 알았지?
진희 (귓속말로) 오빠, 뒤에서 자꾸 누가 건드려.
진석 이리로 가까이 와. 자, 진영이, 진수, 창밖을 봐. 앞으로 서는 정류장마다 이름을 봐두란 말이야. 우리가 탄 정거장 이름이 뭐야?
진영 몰라.
진수 청기와주유소 아냐?
진석 그래, 청기와주유소. 길 반대편도 정거장 이름은 똑같아. 그러니까, 진영이, 진수 너희 둘은 내일 아침에 학교 올 때 청기와주유소에서 내려야 되는 거야. 알았어? 다음이 어디야? 여기. 경남예식장이라고 저 꼭대기에 크게 쓰여 있는 거 보이지? 그다음은 합정동 입구, 그리고 홀트아동복지회관, 그다음은 제2한강교야. 그러니까, 거꾸로, 너희들은 버스가 한강을 건너기 시작하면 밖을 내다보면서 준비하고 있다가 합정동 입구에 도착하면 앞으로 나오기 시작해야 돼. 사람이 많을 테니까 미리미리 움직여. 그리고 차장 누나한테 내릴 거라고 말해. 알았지?
--- p.81~82
진석 진영이 네 역할이 중요해.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 방 연탄불은 꺼뜨리면 안 돼, 알았지?
진영 응.
진석 아침에 나오기 전에 한 번, 저녁밥 먹기 전에 한 번, 그렇게 하루 두 번 가는 거야. 할 수 있겠어?
진영 응.
진석 자, 잘 봐. 지하실로 들어갈 땐 계단에서 머리를 조심해. 그런데 들어오고 나니까 안은 그래도 꽤 높지? 자, 저기 굵은 기둥 같은 거 세 개 보이지? 조그만 철문 달려 있는 거.
--- p.83~84
도연 엄만 화곡동에 처음 이사 갔을 때 어땠어?
진희 화곡동?
도연 응.
진희 뭘 어때. 죽고 싶었지.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 나이 때 기집애들처럼 잔인한 것들도 없어. 아버지 앓아눕고, 우리 버스 사고 나서 집 내놓고 이사 가고 그러는 동안 원래 같이 과외도 하고 매일 도시락도 같이 먹고 하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다 떨어져나가더라. 아침저녁으로 아버지, 진영이, 진수 밥 차려주고 만원 버스에 시달려가면서 학교 가면 벌써 파김치야. 온몸을 이놈 저놈이 부비고 주무르고 그래서 기분은 쓰레기 같고. 그러고 앉아 있다가 돌아오면 엄마는 새빨갛게 얼어서 가게에서 웅크리고 있고, 집에 오면 아버지는 벽 보고 누워 계시고. 매일 똑같았지.
도연 근데, 진수… 삼촌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 p.103
진수 작은형! 엄마가 지하실에 들어가지 말라 그랬는데?
진영 지하실에 안 들어가고 어떻게 연탄을 갈아.
진수 나중에 야단맞으면 작은형이 책임지는 거다.
진영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니까.
진수 왜?
진영 자꾸 병신처럼 굴래? 아무튼 안 된다고.
진수 욕하면 나 안 한다?
진영 에이씨… 알았어. 일단 따라와봐.
(사이)
자, 오른쪽에 계단 보이지? 그리고 그 계단 위에 작은 쇠문 보이지?
--- p.117
진영 엄마, 진수 여기 없어?
진영 모 진수가 여기 와 있간? 와, 집에 없넌?
진영 형은?
진영 모 형은 지금 막 학원 갔다 와서 안에서 밥 먹고 있지. 와?
진영 형! 형! 진수 못 봤어?
진석 못 봤는데.
진영 모 글쎄, 형 지금 막 들어왔다니까 진수를 어서 보간? 와 그라네? 진수가 없네?
진영 어, 진수가 없는데, 어디 갔지?
진영 모 글쎄 갸가 지금 시간에 어딜 가간? 야, 진석아.
진석 예.
진영 모 너 야랑 같이 올라가보라우. 진수가 안 보인단다.
진영 모, 진석, 진희, 진수를 부르며 돌아다닌다.
진영 집으로 올라가는데,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어요. 진수야! 진수야! 목청껏 부르면서
올라가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어요. 진수야! 진수야! 진수야!
제가 주의 사항을 잘 전달했을까요?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요. 그날의 그 지하실에 다시 가보고 싶어요. 그런데 만약에 갈 수 있다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만약에 갈 수 있다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만약에 갈 수 있다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형과 제가 지하실에서 불빛이 새는 걸 보고 지하실에 들어갔을 때, 진수는 지하실 아버지 방 아궁이 계단 밑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새 연탄을 집어넣은 화덕은 밖에 나와 있었고요. 불구멍을 맞추지 못해서 불은 제대로 붙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형이 종점 근처에 있는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산소통에 집어넣었지만, 진수는 의식을 회복한 뒤에도 결국 제정신을 차리지는 못했습니다.
--- p.123~125
진영 제가 얘기했던가요? 무언가를 쓰고 있는 젊은이처럼 아름다운 게 없어요. 저는 성공하지 못한 거 같지만, 저 애는 어쩌면 자기가 보고 있는 거, 자기가 쓰고 있는 것 덕분에 구원받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다고 해서 이미 고정되어버린 과거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요. 구원… 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이라면 아마 그런 게 희망이겠죠.
---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