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병원과 상조회사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이란 말로, 고민 없이 단일화한 장례 절차에는 ‘고인의 생애와 애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정신없는 접객, 조문, 국밥, 관과 수의 선택, 3단 5단 화환이 ‘상조 트랙’ 위에서 맹렬하게 돌아간다.
남은 자들끼리 쫓기듯 치른 이 ‘판에 박힌’ 예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지금의 염습과 완장, 영정과 수의가 예법에 맞기는 한 걸까. ‘불효자’ 소리는 듣기 싫은 경황 없는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이쑤시개 하나조차도 돈으로 계산된’ 장례 청구서.
‘작은 장례식 운동’을 펼쳐온 국내 최초의 임종 감독 송길원은 말한다. “과도한 제단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 자리에는 고인의 생애가 요약된 스토리텔링 사진과 유품, 편지 등이 놓인 ‘메모리얼 테이블’이 있어야 한다고.
---「권두 인터뷰」중에서
알리는 은퇴 3년 만인 1984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했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병원이었다. “상대방을 KO시킬 뿐 아니라 눕히고 싶은 라운드는 내가 정한다”라던 알리도 죽음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74세에 그는 KO패를 당했다. 장례를 위해 고향 캔터키주로 시신을 옮겨야 했다. 알리의 장례식은 밥 거널이 총괄했다. 그가 임종 감독이었다. 알리의 가족과 측근을 태운 전용기에서 알리의 죽음을 알렸다. 이 모든 시나리오는 장례 매뉴얼을 담은 『더 북The Book』에 들어 있었다. 알리가 직접 계획한 것이었다.
장례의 하이라이트는 8만 8,000장의 장미꽃잎이었다. 꽃잎은 운구 차량을 위한 레드카펫이 됐다(구글에서 “알리 운구차량”으로 검색해보라). 이 역시 플로리스트인 매기 카사로가 기획한 ‘장례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한국이라면 어떨까? 장례의향서는커녕 유언도 없다. 영원히 살 것처럼 버티다가 창졸간에 떠난다. 해맞이, 달맞이는 있어도 죽음맞이는 없다. 미국 대통령은 취임 순간 ‘죽음 계획’을 세운다. 대통령 유고 상황은 국가적 재난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장례는 자신을 선출해준 국민과의 마지막 대화다.
그래서 엄중하다. 나라의 품격이 담긴다. 죽음이 그 나라의 역사가 되고 유산이 된다.
---「제1장. 이어령, 죽음의 스승이 되다」중에서
장례 도우미의 위세는 어디서나 위풍당당이다. 영정사진을 가리고 관 앞에 서서 손 지휘까지 한다. 그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누구도 관과 유골함(영정사진 포함)을 앞설 수 없다. 유족들도 고인을 앞세워 뒤따른다. 저런 싸구려 의전은 대체 누가 가르쳤을까?
팔뚝에 완장을 채우고 상장(喪章)을 다는 것도 그들이다. 대단한 의식이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은 삼베로 만든 상장을 가슴에 달도록 규정했다. 2009년 「건전 가정의례준칙」에도 상장 조항이 있다. 완장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상장이 마치 화물의 짐 꼬리표 같지는 않은가? 일제 시절에 배운 것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다. (…)
우리는 꽁꽁 묶는다. 무슨 죄가 그리도 큰가? 그것도 모자라 영정사진에 띠를 둘러 죄수를 만든다. 수인(囚人)의 ‘수(囚)’는 가둘 수다. 파자(破字)해 보라. 죄를 지은 사람은 사방으로 가로막힌 교도소에 가둔다. 인질·포로로 잡아넣었다는 뜻이다. 그게 영정 띠의 상징이다. 그렇게 해서 죽은 자를 또 한 번 죄수(罪囚)로 만들어 만천하에 공포한다. 관도 죄수를 밧줄에 묶어 끌고 가듯 운구한다. 비참하다. 관은 어깨 위로 올려 들어야 한다. 이것이 고인에 대한 마지막 공경의 표시였다. 상여를 메고 나갈 때도 그러했다.
디그니티dignity 즉, 존엄과 품위였다.
---「제2장. 장례에 대한 유쾌한 반란」중에서
이제, 휠체어를 장착한 어린이 전용 ‘소원 앰뷸런스’가 세계에서 첫선을 보인다. 세상에! 성인용 앰뷸런스는 넘쳐났으나 어린이만을 위한 앰뷸런스는 없었던 것이다. 유모차에 신세 진 지 57년 만에 앰뷸런스로 갚아주는 셈이라고나 할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돌봄과 양육의 상징, 캥거루를 캐릭터로 했다. 아이들을 위한 레고 장난감과 애착인형, 아동도서와 영상장치도 비치했다.
2022년은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 존중을 강조하며 어린이날을 제정한 지 100주년 되는 해다. 소아암 환자수는 국내 1만 6천여 명으로 추정되며, 매년 1,200명이 추가 발병한다. 여기에 진단조차 못 받은 ‘상세불명 희소질환’ 100여 명을 포함해 희소질환 환아도 매년 500여 명이 넘는다.
이들을 돕고 싶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배우 이영애 씨가 기꺼이 동참했다. 어린이 앰뷸런스 기증식을 하는 날이었다. 차량 열쇠를 넘겨주고 우창록([하이패밀리] 이사장) 변호사와 함께 차담회를 가졌다. 휴심정 데크에 앉아 차를 마시는 내내 이영애 씨의 눈은 정인이가 잠든 안데르센 공원묘원을 향해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사건이 있자 승빈이, 승권이를 데리고 한걸음에 달려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앞선 세대가 땀 흘려 잘살도록 만들어주었는데, 우리도 당연히 자기가 속한 세상과 공동체에 보답해야 하지 않나요?”
왜 세인이 그를 오드리 헵번으로 떠올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제5장. 생애 끝자락에서 버킷리스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