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돌아서 갑시다
먼발치라도 좋습니다
봄을 구경하고 갑시다
유리창 너머로 찾아온 봄볕에 취해
고양이는 잠들었습니다
꽃피는 나무는 버려두십시오
꽃보고 대드는 벌, 나비도 버려두시오
아직 뒹구는 낙엽은
봄비에 젖어
흙 속으로 구겨져 들어갈 것입니다
이 봄은 벚꽃놀이 아니면
신나는 일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벚꽃에 봄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영원할 우리들의 꽃 피울
씨앗으로 골라 뿌리는 봄을 생각해 봅시다
뿌리는 씨만큼은
우리들의 몫이랍니다, 벚꽃이 지고 나면
우리 다음엔 무궁화 씨를 뿌립시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피는 무궁화 씨를 뿌립시다
8월에는 광복절의 달입니다, 무궁화 씨를 뿌립시다
---「무궁화 씨를 뿌립시다」중에서

봄 가고 여름 가고 가을도 가고
그 푸르던 산야 낙엽 몰고 쓰러지면
황량한 겨울의 흰 눈 쌓인 제천
그 제천에는 파란 꽃이 피어나네
눈 속에서 더 광채를 빛낸다네
겨울의 파란 꽃!
겨울바람 몰아쳐 눈보라 몰아쳐
깊어 가는 제천의 겨울 마당엔
젊음의 등에 걸고 가던 스케이트 칼날이
번득이듯 뾰족한 파란 광채의 솔잎 빛난다네

사랑하던 님들은 떠나고
겨울이면 제천에 피는 꽃
제천 소나무 홀로 남아 연초록 눈물 흘리네
---「겨울이면 제천에 피는 파란 꽃」중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물-곬에서
봄의 소리가 들린다
졸 졸, 줄 줄, 콸 콸
봄의 소리가 들린다
쿠루룩 콸콸 쿠루룩 콸콸
논배미에 물 대는 소리
주루룩 줄줄 주루룩 줄줄
밭둑이 젖어 들어
자운영, 해아리벳지
연초록 융단 위로
망아지 뛰는 들녘에서
봄이 부른다
졸졸, 줄-줄, 콸콸
봄의 소리가 들린다
---「물-곬」중에서

까만 머리 너울너울
다가오는가 했더니
흰 머리 풀어 헤치고
엎어졌구나 철-썩

밝은 달 모래사장으로
숨 가쁘게 달려오던 너의 젊음은
흰 머리 풀어 헤치며
철-썩 쏴-

까만 머리 너울너울
젊었을 때는 까만 밤
흰 머리 풀어 헤치고
내 앞에 엎어져 철-썩

우는구나 흰 머리 풀어 헤치고
내 앞에 엎어져 우는구나
바다여 해변이여,
내 젊었던 날들이여
---「해변의 연가」중에서

창밖엔 흰 눈이 함박 쌓였다
할멈이 분주하다
뭘 하시나
수정과 만들어 보려고
곶감이 없잖아
곶감 없이도 수정과는 됩니다
에-이 그러면 앙고 없는 찐빵이야
창밖에는 눈꽃이 함빡 피었다
할멈이 들고 온 수정과 속에는
곶감이 넙죽이 엎드려 있다
창밖에는 눈꽃이 함빡 피어 눈길을 끄네

<B>■ 시인의 말<br/></B><br/>서문<br/>무궁화 씨를 뿌립시다<br/><br/>생활을 위해 달려온 인생의 행로 속에서 정신적 길잡이가 된 글쓰기가 6시집 발간 시점에 들어서며 시집 제목을 두고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오솔길” 나이가 먹어 가며 더구나 코로나에 잠긴 세월에 정신 성향도 노쇠해져 가는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대로 함몰(陷沒)되어 가는 것이 싫어 갑자기 출간 목전에 있는 6시집 제목 오솔길에 스스로 문제를 제기해 보며 30년 전쯤 못 쓰게 되었던 중풍 환자의 오른손에 펜대를 다시 끼고 글쓰기에 온 정성을 들이던 초심작 “제천 소나무” 시집을 꺼내어 다시 읽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그러자면 편집이 되어가고 있는 6, 7, 8 시집 작품들을 전부 바꿀 수는 없어도 6시집 제목을 국적이 있는 시로 먼저 바꾸고 이 시간 이후에는 쓰는 시들을 더 깊이 고뇌하며 써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마음가짐을 챙겨 보게 되었습니다. <br/><br/>더 깊이 고뇌하여 국적이 있는 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 진리, 순수, 진실을 탐구하고 고향을 국토를 사랑하는 시. 가족과 친지와 민족을 두텁게 사랑하는 시. 초심에 집착하던 서정시의 완성도에 깊이 접근하는 시. 이런 모든 것에 더 깊이 고뇌하며 써야겠다고 몇날 며칠을 다짐하며 표지 사진이 된 “오솔길”에 기왕 가는 것 민족의 꽃이 된 “무궁화 씨를 뿌립시다”로 바꾸기로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오솔길”을 들어서며 내가 걷고 있는 곳곳에 새롭게 무궁화 씨라도 뿌리며 가겠다는 작가의 심정 변화는 늙어가면서 흐려져 가는 국적 있는 글쓰기의 일맥을 끝까지 이어가고 싶은 결정임을 밝혀두고 싶었습니다. <br/><br/>고향 산천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랑의 시를 뿌려가며 젊었을 때 한때 추구하던 서정시에 대한 고뇌도 더 깊이 성찰해 보는 길을 걸어보겠다는 또 한 번의 늦은 다짐이 꺼져가는 등불의 마지막 기름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저의 6시집 『무궁화 씨를 뿌립시다』를 상재해 올립니다. <br/><br/>2022년 9월<br/>충북 제천시 신동 돌모루에서<br/>제천 소나무 박광옥 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