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이 저에게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눈빛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그 지인이 2050세대라면 호기심의 마음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지고, 6080세대라면 두려움의 마음이 조금 더 크게 느껴집니다. 간혹 요양병원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하는 뉴스를 보고는 “나는 늙고 병들어도 절대 요양병원에 가지 않겠다.”라며 애써 피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기심과 두려움, 회피 하려는 마음은 아직 요양병원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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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불편해서 늘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강제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셨다가 함께 간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남으신 그 옛날을 회상하신다. 또, 다섯 남매를 낳아 기르고 농사짓고 살림하느라 허리가 굽어 침상에 제대로 눕지 못하시는 할머니는 한국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이들을 업고 안고 피난길에 나섰던 그 옛날을 회상하신다.
--- p.14
나는 이런 어르신들의, 산 위로 뛰어올라가 나무 기둥에 매달려 사라호 태풍 1959년에서 목숨을 건진 일화, 콜레라와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었던 일화를 들을 때마다 내가 마주하는 환자복 속 앙상한 노구에 감춰진 백절불굴의 생명력과 삶에 대한 의지에 경외감을 느낀다.
--- pp.14~15
나도 언젠가 요양병원의 어르신들처럼 나이 든 엄마가 될 것이다. 그 노년의 침상을 가득 채워 줄 아이와의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다. 고된 육아의 시기도 다시 오지 않는 시절임을 알고 감사히 여기겠다. 그리고 노후를 맞이하였을 때, 부족한 엄마에게 와서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효도를 다했다고 꼭 말해줄 것이다. 늙은 엄마를 봉양하는 데에 너무 많은 힘을 쓰기보다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기를 당부하고 싶다.
--- p.21
꽃이 피면 설레고, 꽃이 지면 괜스레 서글프며, 꽃잎이 채 시들기도 전에 떨어질 때는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것조차 환자에게 큰 실례가 되며 의료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이 아니기에 그저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고 몸이 굳지 않도록 치료하고 운동을 도와주는 것으로 조용히 나의 응원을 전한다.
--- p.46
부부가 함께 입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식들이 출가하고 두 분이 생활하시다가, 한 분이 편찮으셔서 간병이 시작되고, 고된 간병 노동으로 돌보던 분마저 병을 얻거나 지병이 악화해 같이 입원하는 경우다. 부부는 2인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경제적 이유와 간병의 어려움으로 남녀 병동에서 각각 생활하시기도 한다. 또, 따로 생활하실 경우 보통은 서로의 병실을 오가며 만나시는데, 여의찮으면 휴게실에서 만나신다.
--- pp.50~51
가까운 미래에는 노인이 백 살을 사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동의하듯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건강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항상 상수의 비결을 탐구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 p.68
노후 보장을 개인의 노력에만 맡겨 두지 말고 국가와 사회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보호자가 없는 노인도 안심할 수 있는 성년 공공후견, 노인의 자산을 보호하는 금융 제도 등 법적 제도를 정비하고 노인 요양 정책 전반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또한 취업, 혼인, 출산, 육아 등의 청년 문제와 간병, 부양, 빈곤 등의 노인 문제는 연결된 하나의 위기임을 인식하고 구성원 모두가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 p.86
그러나 부정하고 회피한다 한들 죽음을 피할 수 있겠는가. 삶의 시작인 탄생이 중요한 만큼 그 마무리인 죽음 역시 중요할 것이다. 일생일대의 사건 죽음, 더는 그 사건의 관찰자가 아닌 주 인공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맞이해야 할까? 나는 웰다잉Well-dying, 좋은 죽음을 맞고 싶다. 바라는 모습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감히 죽음의 순간을 상상해본다.
--- p.115
할매는 굳센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모진 세월의 비바람을 맞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는 바위. 열아홉 살 전쟁미망인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이고 어린 아들과 살아남기 위해 가장 단단한 바위가 되었다. 세상사 웬만한 일에 눈도 깜짝 안하셨고 싸늘한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 흐르지 않았다. 어느 날 그 바위틈에서 여린 풀이 자라났다. 차갑게 메말랐던 바위는 그 풀잎을 금지옥엽처럼 여기고 사랑했다. 나는 할매의 첫 손녀였고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했다. 우리는 25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25년째 되던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 p.140
외로운 병원 생활에서 따뜻한 관심이 필요했던 어르신들께 의례적인 무심함으로 대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그 차가운 손을 금방 알아채셨다. 환자를 진료하는 한의사로서도,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도 위기인 순간이다. 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초심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었다. 환자의 몸과 마음을 함께 살피는 한의사가 되고 싶다던 그 순수한 마음에 다시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다.
--- p.176
나 역시 오랜 기간 시설 돌봄의 종사자로 일했지만, 노인 환자를 가까이에서 돌보는 직업인의 입장과 편찮으신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자식의 입장은 달랐다. 막상 내 가족을 간병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언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일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 p.187
라뽀Rapport는 ‘관계’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의료인과 환자 사이의 관계와 신뢰 정도를 일컫습니다. 의료에 있어서 라뽀가 필수적인 이유는 의료진과 환자 간에 신뢰와 의사소통이 없다면 치료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라뽀를 형성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요양병원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요양병원의 특성상 환자 대부분은 삶의 마지막 순간인 임종까지 의료진과 마주하게 됩니다.
---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