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는 하루도 빠짐없이 자극을 내보낸다. 자극은 본능을 향한다. ‘소비자’의 본능을 대신해 먹고, 입고, 자고 가끔은 죽고 죽이기도 한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소녀 옆에서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까마귀처럼 소비자는 따뜻하고 안락한 곳에 앉아 더 싱싱한 먹잇감을 찾으며 말한다.
‘아, 이런 혼탁한 세상에 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오늘, 무엇을 기다리는가? 신은 어쩌면 멀지 않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오늘, 누구를 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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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전문 채널 TNJ 기자인 정원은 작년 초, 보도국에서 탐사 기획 팀으로 옮기며 팀장으로 승진한 후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 ‘서정원의 오늘이 아닌 뉴스’를 기획했다. 매주 목요일 밤 프라임 시간대에 80분 동안 방영되는 ‘오늘이 아닌 뉴스’, 줄여서 ‘오아뉴’는 범죄, 부패, 기업 비리, 미제 사건 등의 탐사 보도가 메인이다.
한때 떠오르는 대선 유망주였던 정치인의 비리 사건에서 핵심 증거인 노트북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 찾아온 일로 스타덤에 오른 뒤 특종상을 연이어 세 번이나 받은 독종 기자 서정원. 국내 주요 인물들, 쉽게 입에 올리기 힘든 사건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오아뉴는 정원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프로그램으로 방송마다 화제를 몰고 다녔다. 특히 오아뉴의 마지막 10분을 장식하는 대국민 사이다 코너 ‘멱살 한번 잡힙시다’는 영웅 서정원이 나쁜 놈들의 멱살을 시원하게 잡아채는 CG로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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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몰랐어?”
“국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설 감독이랑 차은새 관계, 진짜 몰랐냐고.”
“국장님은 사모님이 골프 프로랑 바람났을 때 아셨어요?”
정신이 반쯤 나간 듯 힘없이 대답하는 정원을 향해 강 국장이 소리쳤다.
“야, 인마. 나랑 너랑 지금 상황이 같아? 이건 단순한 불륜 스캔들이 아니잖아. 살인 사건이라고.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에, 살해 동기까지 생겼어. 까딱 잘못하다가는 너 지금 살인자 되게 생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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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연립주택을 바라보던 정원의 입에서 이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서정원, 너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귀신에 홀렸었구나. 이런 동네에, 이런 집에 이의진이 숨어 있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었을까.’
초호화 펜트하우스에 살면서 최고급 슈퍼 카 수십 대를 바꿔 타던 수천억 대 사기꾼이 이런 곳에 숨어 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었지? 사건 발생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떻게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지저스라는 인물을 믿을 수 있었을까. 단 한 번 본 적도 없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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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달린 태헌이 유치장 화장실 앞에 섰다. 입구에서 웅성거리는 순경들을 제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태헌이 본 것은 형사 김태헌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인간 김태헌으로는 처음 느껴보는 공포가 가득한 장면이었다.
사망한 김민철. 화려한 스카프를 목에 감고 대롱대롱 매달린 민철이 태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 그렇듯이 그 초점 없는 눈으로.
형사님, 저는 정말 아닙니다. 얘기할게요. 그러니까 서정원 기자 좀 불러주세요. 형사님, 형사님.
대롱대롱 매달린 민철의 입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검붉은 얼굴에 끝도 없이 내려온 혓바닥이 자꾸만 태헌을 부르고 있었다.
내가 안 죽였다고 했잖아. 이 개 같은 경찰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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