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상대의 표정은 어딘가 언짢아 보였고,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면 난 또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이런저런 것이 자꾸 거슬리고 머릿속에 ‘왜’란 궁금증이 끊이지 않는 내가 어딘가 모난 구석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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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따지고 묻고 싶었지만 예민하다는 말이 자꾸 말을 삼키게 했다. 희망은 하나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겠지. 세대가 달라지면 생각도 바뀌겠지. 변화는 생각보다 꽤 느린 것 같다. 아직도 두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태연하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말은 좀 그런데”라고 하면 “아, 그런가?”라며 부끄러워하거나 자제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되레 발끈하기도 한다. 별생각 없이 한 얘기인데 뭐가 그렇게 잘못됐냐고. 그럼 나는 속으로 대꾸한다. 생각이 없는 게 잘못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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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내가 주변에서 자주 듣고 불편했던 말과 그에 관한 생각, 변했으면 하는 우리의 태도를 담았다. 나처럼 예민하다는 말에 ‘그런가?’라며 자신을 의심하고 할 말을 삼켜온 여성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 더불어 자신도 모르게 습관처럼 해온 말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더 한껏 예민하게 ‘왜’라는 질문을 함께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
--- p.8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누군가 내게 “기가 너무 세”라고 하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이렇게 답한다. “그쪽 기가 약한 거예요.” 그럼 대체로 머쓱한 표정만 지을 뿐 더 이상 다른 말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 대꾸할 말이 하나 더 떠올랐다. “남자들이 어려워할 스타일 같아요”라고 하면 이렇게 답하는 거다. “그쪽은 여자들이 쉽게 볼 스타일 같아요.” 꽤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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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웹사이트 ‘톰디스패치’에 리베카 솔닛이 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수많은 여성에게 공감을 얻었고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퍼졌다. 이후,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고, 2010년엔 〈뉴욕타임스〉 올해의 단어로 꼽히고, 2014년엔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수록되었다. 그간 나를 포함한 얼마나 많은 여성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들어왔을까. 얼마나 많은 여성의 말이 허공을 맴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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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내려면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설득이든 주장이든 반박이든 할 수 있고, 냉혹한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필요하다면 진심을 담은 사과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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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있는 많은 여성이 맘껏 욕심낼 수 있으면 좋겠다. 당당히 욕심을 드러낼 수도 있으면 좋겠다.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 남성들이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당신의 아내가, 형제가, 동료나 친구 또는 선배가, 혹은 딸이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을 일이다.
--- p.37
자신이 가진 무기(권력이든 힘이든)를 슬쩍슬쩍 내비치며 “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걸 휘두를 수 있어”라고 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도 절대 농담이 될 수 없다. 그 말 속엔 ‘그러니 함부로 까불지 마. 적당히 해’란 뜻이 담겨 있다. 아무리 별 뜻 없이 한 말이라고 해도 약자에겐 협박과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고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고 자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p.53
별 뜻 없이 하는 말이라지만 ‘남자답다’나 ‘상남자’ 혹은 ‘여자여자하다’나 ‘천생 여자’ 같은 말을 계속 듣고 자라면, 여자는 약하디약해서 남자에게 의존해야 하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이끌고 항상 여자보다 강하고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여자보다 뛰어나지 않은 남자는 열등감이 생기고, 혹시 여자보다 못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 p.59
생각할수록 불쾌한 일이라 그 자리에서 즉각 대처하기도 쉽지 않다. 뒤돌아서고 나면 ‘아, 아까 한마디 할걸’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니 속이 좁아 보일 것 같고 말하기도 구차하다. 말하면 왠지 나만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불쾌해도 매번 그냥 넘어가게 된다. 그냥 넘어가는 것치곤 이런 일은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다.
--- p.64
사회는 계속해서 저출생 운운하며 출산을 장려하지만, 회사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민폐가 된다. 그렇다고 전업맘이 되면 경제 활동을 들먹이며 한심한 눈초리를 하고, 직장맘이 되면 살림과 육아를 트집 잡는다. 출산을 장려할 거면 이 모든 걸 해결해주든가, 해결 못 할 거면 조용히 있든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 p.97
나쁜 일이 계속 벌어지면 나쁜 행동을 하는 쪽에 경고하고 통제를 가해야 할 텐데, 사회는 반대로 움직인다. 나쁜 일을 당할 수 있는 쪽을 더 억압한다. 밖은 위험하고 남자는 조심해야 하니 세상 밖으로 나가지 말고 몸은 더 가리라고. 게다가 나쁜 일을 당하면 경계를 늦추고 조심하지 않은 쪽을 비난한다.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 p.105
그래서일까, 우아하게 대처하라는 말은 내게는 인내하고 견뎌내라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우아해야 할 쪽은 약자가 아니라 힘을 가진 자여야 한다. 힘을 마구 휘두르는 쪽엔 아무 말이 없고, 맞는 쪽에 대고 우아하게 대처하란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겁하다.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에서 이진송은 우아함은 당면한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삭히도록 유도하는 마취제 같다고 했다.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우아함은 모든 문제를 내가 대처를 잘못한 탓으로 여기게 하고 결국엔 입을 다물게 하는 힘이 있다. 마치 마취제처럼.
--- p.169
토를 다는 것과 의견을 말하는 것은 다르다. 타당한 이유나 대안 제시 없이 반대하거나 하기 싫다는 건 토를 다는 게 맞다. 의견을 제시할 거면 정확히 하고, 다른 의견이 없으면 지시에 따르는 게 회사 생활 기본 규칙이다. 그저 투덜거리기만 하고 결정된 사안도 제대로 따르지도 않는다면, 이건 군대 문제가 아니라 회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 p.181
모든 여성이 똑같은 통증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많은 여성이 고통받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여성이 있다. 이 정도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기보단 여성 문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사회의 인식은 아직 그렇진 않은 것 같다.
--- p.194
사람은 누군가를 평가할 때 우월감을 느낀다. 마치 특권이라도 지닌 것처럼.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남 평가하길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우월감을 채우려 남을 깎아내리는 건지도. 그러니 평가 대상은 주로 나보다 힘이 없거나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그랬으면 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일까. 유독 여성이, 어떤 기준도, 좋고 나쁨도, 옳고 그름도 없어 논하기 쉽고 비하하기 편리한 외모가 평가 대상이 되는 건.
--- p.211
그런데 세상은 이 소수의 예민한 사람들이 하는 말에 의해 변화한다. 유난스럽게 문제를 깊이 파고들고,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말을 굳이 소리 내어 이야기하고, 남들이 다 포기할 때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외면하고 지나치던 것들이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하고 결국엔 변화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소수야말로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들이 없으면 우리 삶은 정체(停滯)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34 고로 예민한 사람은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다.
--- 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