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테리어’라는 인테리어 트렌드가 있다. 식물로 집이나 공간을 꾸미는 것이다. 이것은 식물을 인테리어 소품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뻐서 산다. 그리고 두어서 예쁜 곳에 둔다. 이 식물이 직사광선을 피해야 하는지, 빛을 많이 필요로 하는지, 응달에 두어야 하는지, 환기는 어떤지보다 공간의 무드와 잘 어울리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렇게 불편함을 감내하던 식물이 잎을 떨구고 ‘망가지면’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화분을 들인다. 식물은 장식용 소품이 아니다. 식물은 이동하지 않을 뿐이지, 매일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살기 위해 주변 환경을 기민하게 인식하고 반응하는 생물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나, 들을 수 있는 소리 등의 자극을 만들어내지 못할 뿐, 환경적 자극에 대해서 분명히 반응을 나타낸다.
---「나는 너를 죽이려 했다」중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의 자서전을 한 번씩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가 타인의 자서전을 완독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타인의 자서전을 단편만 볼 수 있는데, 그걸 보고 저 삶은 틀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처럼 삶에도 정답이란 없다. 남들의 자서전을 보고 나니 내 것이 초라하고 못마땅해 보여서 타인의 자서전을 베끼려 하기도 한다. 불가능하다. 그다음을 이어 나갈 단어의 조각을 얻을 수가 없기에 베껴 쓴 자서전은 이상한 곳에서 끝난다. 각자의 자서전은 각자가 얻어낸 단어의 조각으로만 써야 끝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다.
---「논문은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중에서
인간이 원자와 다른 점은, 동일하게 정의되는 결합들이 다양한 결합 거리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수소와 산소의 결합이 가지는 가장 안정적인 결합의 형태와 결합 거리는 늘 동일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될 때의 결합 거리는 각각의 부부 쌍마다 완전히 다르다. “부부로 정의되는 관계라면 응당 이 정도의 거리가 옳다.”가 아니라, 100쌍의 부부가 있으면 100개의 결합 거리가 존재한다.
---「가장 가깝기 위한 거리두기」중에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나를 만드는 전부가 아니다. 고작 거주지나 삶의 패턴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 패턴마저 바뀌는데, 하물며 우리가 물려받은 것이 무엇이든 바꾸지 못할 게 뭘까.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과 닮은 내 얼굴을 보면서, 또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몸짓과 말투로 인해,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목구비는 닮았더라도, 편안하고 부드러운 표정이나 온화한 미소는 내가 만든 나의 것이다.
---「유전적 독립」중에서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정말 싫다. 그래도 날씨가 좋으면 집 앞에라도 나가서 하늘과 구름, 햇살, 바람의 인상 따위가 기억으로 새겨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곤 한다. 그리고 그 느낌들이 체계적으로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표현이 어려운 무형의 감각들을 한참 동안 말로 표현하고 문장으로 만들어낸다. 나는 잘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성이 비이성을 압도하도록, 과학의 힘을 빌려 본다.
---「잊으려 할수록 가까워지는 절망에 대응하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