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기 병원에 혼자 와서, 좁은 신경과 의사의 진료실에 앉아 있다. 여의사는 우리 사이에 놓인 서류를 뒤적인다. 의사가 말을 시작하자 말이 아니라 날 보는 눈빛이 내 마음에 깊이 박힐 것 같다. 측은해하는 기색이 완연한 눈빛. 사실 그녀는 늘 간단히 말하는데, 내가 좁은 진료실로 불려 들어간 후 그마저도 필요 없었다. 의사가 앞에 놓인 서류를 집기 전에 난 힐끗 보고 진단명을 알았다. 알츠하이머. 이제 의사는 문건에 적힌 그 어휘와 다른 어휘-치매-를 가리킨다. 펜으로 두 단어를 교대로 짚으면서, 이게 내 주치의인 가정의에게 보낼 편지라고 설명한다. 이 순간 난 그녀가 두 단어를 지적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내가 그녀의 말을 믿는지 확인하려고, 더 확실히 해두려고 그럴까? 내가 사실을 받아들이는 내색을 하지 않고 무표정해서일까? 난 눈만 움직여 앞에 놓인 문건을 쳐다본다. 난 차분하다. 질문할 게 없다. 대답이 앞에 문서로 남아 있는데 뭘. 비디오에서 키스 올리버는 치매의 여러 긍정적인 면을 말했지만, 난 치매 진단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다. 그 허망함에 대비 못했다. 이 단어들이, 이 편지가 모든 것을 바꾸리란 걸 알기에, 내가 아는 삶을 바꿔버리란 걸 알기에. 이 어휘들은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것이다. 나는 쉰여덟 살인데, 방금 초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난 혼자가 아니야」중에서
상태가 나쁜 날, 텔레비전 화면이 꺼지기 시작할 때처럼 흐릿해서 더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안개가 내려앉고 어리둥절해서 눈을 뜬 순간부터 명확한 게 없다. ‘여기가 어디지?’ 침대 옆에 놓인 메모지 속 내 글씨가 낯설기 짝이 없고, 잠든 사이 누군가가 살그머니 들어와 써놓은 어휘 같다. 그런 날이면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치 밤사이 잠결에 뇌가 비워지고 재부팅되어, 공장에서 출시할 때처럼 세팅된 것 같다. 매일 아이패드와 휴대전화 알람이 약 먹을 시간이라고 일깨워준다. 매일같이 하루 두 번 하는 단순한 일이지만, 상태가 나쁜 날은 알람이 울리면 그게 뭔지 모른다. 매번 그렇다. 알람이 없으면 약 복용은 물 건너간 일이다. 그런 날은 내가 엉킨 목걸이 줄 같다. 한자리에 몇 시간이고 앉아 꼬인 매듭을 풀려고 끙끙댄다. 뇌에게 가장 간단한 말을 시키려고 애쓴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전화기에 알람 설정을 해두었나? 힌트를 얻을 옷가지를 내놓았던가?’ 차분할 때는 참을성 있게 앉아 목걸이를 풀면서, 현실을 파악하거나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목구멍에 공포가 치밀면, 그게 심장을 삼켜서 박동이 더 세고 빠르고 소란해지면, 내가 지고 말면 이 ‘목걸이’가 답답해진다. 그래서 목걸이를 바닥에 팽개치지 않으려고, 생각이 구슬처럼 흩어지게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분홍색 자전거를 타고」중에서
치매가 괘씸한 것은, 내게서 빼앗아가는 것 때문이 아니라 딸들을 괴롭히려는 수작 때문이다. 그들에게 초래할 혼란 때문이다. 치매는 멋대로 굴어서 삶을 넝마로 만들고, 온전한 사람이 있던 자리에 망가진 해골을 남겨놓는다. 나는 항상 그 남편처럼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영상통화 같은 사소한 수단이 고맙다. 덕분에 여전히 딸들의 얼굴을 보고, 헷갈리는 전화 거는 일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그런 때는 치매가 스멀스멀 생각을 파고들어 피하려고 버둥대는 현실을 휙휙 보여준다. 긍정적으로 볼 수 없고, 그날 스치는 생각마다 상실감이 달려든다. 나 자신, 정신, 장래, 현재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그 순간 문득 감당하기 버거운 사실이 떠오른다. 미래는 애매한 개념일 뿐, 확실한 것은 내가 퇴행한다는 사실밖에 없다-딸들은 그 과정을 고통스럽게 지켜볼 테고.
---「아직 ‘배울’ 수 있다」중에서
얼른 의문을 지워버린다. 그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현재의 방향으로 돌리고 싶을 뿐, 그 길로 내려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지금’이 매일 변한다. 오늘의 나는 6개월 전과 다르다. 그때의 나는 1년 전과 달랐다. 본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그게 가장 두렵다. 내가 가진 건, 우리 모두가 가진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나’라고 부르는 그것. 새로운 나를, 뿌연 기억을 가진 나를 믿을 수 있을까? 지금부터 6개월이나 1년 후의 그 사람은 어떨까? 그 사람은 해나갈 수 있다고 똑똑히 밝힐 수 있을까? 계속 나아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내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유효기간이 있음을 안다. 아직 찾거나 알아보지 못한 선택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아이패드에 알람을 설정해서 식사와 약 먹는 시간을 챙길 수 있을까? 이런 장치는 혼자 지내게 돕는 기본 요소다. 지금의 나는 요양원 입원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의 나는 어떨까? 그 사람은 요양원을 어떻게 느낄까? 난 아직 그 사람을 모르고, 예전의 나를 잊었다. 지금의 나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이 더 좋다.
---「그래도 빼앗기지 않은 것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