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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 국선변호사 세상과 사람을 보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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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2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46g | 145*210*20mm
ISBN13 9788959896196
ISBN10 8959896195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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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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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과일의 시간은 이렇게라도 되돌릴 수 있는데 부모가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되돌릴 방법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늘 막막하고 아득했을 20여 년을 두 분은 지치지도 않고 묵묵히 견뎌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러시리라. 자식을 기다리는 모든 부모의 시간이 다 그렇듯이.
--- p.22

나도 이제 이 사건을 마음에서 정리해야 할 때였다. 젊은 할아버지의 거짓말에 넘어가 머리를 쥐어짠 시간 때문에 못내 억울했던 심정을 내려놓자고 마음먹었다. 지나고 보니 지금은 딸의 이름도 떠올리지 못하는 엄마가 자식들에게 당당하게 거짓말하던 그 시절마저 그립다.
--- p.46~47

그의 아들은 금쪽같은 휴가를 내서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켰을 것이다. 입원시키려고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퇴원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던 걸까. 아들은 아버지가 퇴원하던 때부터 다시 불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아버지가 체포됐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을 때, 아버지를 입원시킨 날처럼 모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수도 있다. 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옥에서도 술을 못 마시니 감옥에 있는 동안 아버지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무기징역이라는 중형을 원한 거라면 감히 어떤 말도 얹기가 어렵다.
--- p.55~56

“(…) 낙숫물이 결국 바위를 뚫지 않습니까. 제게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형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저도 제 몫을 하고 싶습니다.” 반듯한 신앙인으로 살아와서 아직 현실을 잘 모르는 20대 초반 청년이 하는 말이라 여기면 특별할 것도 없는 상황에 나는 뜻밖에도 말문이 막혔다. 삶의 효율에 관해 물었는데 삶의 자세에 대해 답한 우문현답이어서였을까. 효율 따위를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전과자가 되는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도 않았을 테다.
--- p.75

두 사람의 살아온 배경은 비슷할지 몰라도 기질은 아주 다른 것 같았다. 그는 두만강을 세 번이나 건넜으면서도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완전히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적응,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술에 의존했다. 친구의 섭섭한 행동조차 말로 풀거나 털어버리지 못하고 또 술에 기댔다. 친구라고 외로움과 두려움이 왜 없었을까. 친구는 그걸 이겨내고 성실히 일했고, 북한 사람들이 이 사회에 잘 적응해서 좋은 평가를 받길 원했다. 강인한 친구는 잘살아보겠다고 목숨 걸고 온 땅에서 비실비실한 삶을 살았던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p.91

사람의 일에서 생과 사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생사의 문제와는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형사 재판에서도 소송 관계자들이 한마음으로 한 생명을 서류상 존재하게 하는 일과 또 다른 한 생명을 무사히 이 세상 너머로 보내는 일을 한 걸 보니 재판도 사람의 일임을 새삼 알겠다.
--- p.104

그러나 지속적인 치료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본인의 의지,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등 중독자를 지지해줄 주변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병을 고치려는 노력이 단 하루, 단 한순간도(이게 중요하다) 무너지지 않도록 해줄 삶의 굳건한 이유, 덧붙여 치료를 지속해서 받을 수 있게 해줄 최소한의 돈. 이 정도는 갖춰야 한다. 그런데 한쪽 다리를 못 써 노동 능력이 없고, 변변한 직업이 없으며, 가족이나 친구도 없는 데다 돈도 없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게 지속적인 치료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출소 후 며칠, 아니 몇 달, 심지어 몇 년을 의지로 견디고, AA에 빠짐없이 나가면서 자신을 다잡을 수도 있겠지만, 괜스레 슬퍼지고 무기력해져 술 생각이 간절히 나는 어떤 순간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 그 어둠의 빗장을 다시 여는 순간, 그를 ‘딱 한 잔만’의 유혹에서 구해줄 수 있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는 예정돼 있었다는 듯 다시 피고인석에 섰다.
--- p.138

연락이 끊긴 그는 무엇을 하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마지막 300만 원을 해결하기 위해 잠적한 건 아닐 것 같았다. 그 문제가 해결돼도 그가 간절히 바라던 집행유예는 물 건너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무슨 큰 사고를 치고 도피 중인 것은 아닐까. 구속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선수 중에는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어차피 구속될 게 뻔하니 자신이 없는 동안 가족들은 먹고살 수 있도록 미리 크게 한탕 쳐놓는 거다. 발각되면 그 사건으로 형이 크게 늘어나겠지만 눈앞이 급한 선수들은 앞뒤를 재지 않는다. 이런 목적이라면 그동안 그가 친 사고 규모를 훨씬 뛰어넘어야 했다. 10년 동안 사기꾼으로서 아무런 발전이 없었던 그가 이제 드디어 한 단계 높은 범죄를 시도하고 있는 걸까.
--- p.150

몇 주 후 선고 결과를 확인하니 벌금 100만 원이었다. 나는 단호하고 야무졌던, 그러나 지쳐 보였던 딸을 생각했다. 재판은 끝났지만 그녀의 일은 끝나지 않았을 거다. 아버지를 노역장에 보낼 순 없으니, 지금까지도 그랬듯 빠듯한 월급에서 매달 얼마라도 떼어내 벌금 낼 돈을 만들어야 한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아버지가 또 사고를 쳤을까 봐 늘 가슴 졸이는 일상도 딸은 감당해야 한다. 법은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한 아버지를 매번 심판대에 세우고 그에게 벌을 내렸지만, 심판당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모두 딸의 몫이었다.
--- p.188

갑자기 어떤 교수님의 신랄한 명언이 떠올랐다. “정의를 찾지 말고 판례를 찾아라. 그래야 이 땅에서 법조인이 될 수 있다.” (…) 나는 무릎을 쳤다. 이 사건에서 나는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대법원 판례를 무조건 따르다 50대 이웃집 아줌마의 반응을 보고서야 내 결론이 뭔가 잘못됐음을 알 수 있었다. 앞서 인용한 명언이 비판한 건 죄 없는 판례가 아니라 나같이 판례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무늬만 법조인’이었다.
--- p.268

그녀에게 과연 국가란 무엇이었을까. 정책을 잘못 입안해 시위하게 만들고,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무차별적으로 시위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무수한 SNS와 대조하며 단순 시위 참가자를 찾아내 기소하고, 한편으로는 국선변호인을 붙여주면서 방어하게 하고, 대법원에서 새 법리가 나왔으니 무죄라고 하고, 채증이 위헌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반대 의견으로 당신 말도 일리가 있다며 위로하는, 이 모든 모순이 가능한 존재. 그게 바로 국가였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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