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리의 교육론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나 경제에서 구조변화를 구상하는 거시사회학적 혹은 정치경제학적 방법론과는 다르다. 교육은 세계를 읽고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을 만들지만 직접 세계의 변화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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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것들 가운데 최악의 사태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교사가 교실에서 권위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학생들에게 늘 나약해보이고 의심스럽고 학습자와의 관계에서 믿음직하지 못하면 그 교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청소년 때였습니다. 학급질서를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많은 학생들이 함부로 대하는데도 어쩌지 못하고 가만 있는 선생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걸 보고 나는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수업이 2교시였는데도 그 선생님은 이미 완전히 지친 상태로 교실에 들어왔습니다. 심술궂은 학생들은 선생님을 잔뜩 놀려줄 태세를 하고 있었지요. 이 해괴한 수업을 마치자마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감히 등 한 번 돌리지 못한 채 뒷걸음쳐 교실 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쏟아지는 야유를 감당해야 했던 선생님은 늘 주눅들어 있었고, 거의 굳어있었습니다. 교실 한구석에서 나는 그 선생님이 하얗게 질린채 위축되어 교실 문으로 뒷걸음치는걸 보았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허겁지겁 문을 열고 나갔고, 아마 견딜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였겠지요.
아이들을 두려워하고, 그 아이들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던 선생님의 나약하고 기죽은 이미지를 나는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장차 교사가 되리라 희망했던 나는 그 교사의 권위가 철저히 무너지는걸 보면서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최종 결정은 항상 자기 맘대로 내리는 오만한 교사, 즉 무한권력을 휘두르는 군위주의자에게 끌려다니지도 말며 청소년 시절 그 선생님처럼 권한도 존재도 철저히 상실당하고 불안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지도 말아야지, 그래서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라고 말입니다.
--- '여섯번째 편지 :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에서
우리는 어리석고 감상적이라는 말을 듣거나 반과학까지는 아니지만 비과학적이라는 말을 듣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사랑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온몸으로 공부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알게 된다는것을 단순히 허튼 소리로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느낌, 정서, 소망, 두려움, 의심, 열정과 비판적 이성으로써 이 모든 일들을 해냅니다. 결코 비판적 이성만으로 공부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알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지와 정서는 둘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오랫동안 낮은 봉급, 사회적 홀대, 그리고 냉소주의의 희생양이 될 위험 속에서도 계속해서 가르쳐왔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의 관료화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시도를 그만두는것이 차라리 물질적으로 이들이 될지라도 이 도전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 머리말 : 교육학의 함정에서
시인 티아고 데 멜로가 말했듯이 교육자들에게 일종의 무장된 사랑이 없다면 그들 직업의 부정적인 면들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장된 사랑이 없다면 쥐꼬리만한 봉급과 교사들에 대한 홀대 등 정부의 멸시와 모든 부조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교사는 자식을 양육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분명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교원노조에 참가해 적극적으로 저항활동을 하고, 그 때문에 처벌받더라도 여전히 학생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싸우고, 고발하고, 선언할 권리와 의무를 믿는 사람들의 치열한 사랑, 즉 무장된 사랑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진보적인 교사에게 꼭 필요하고, 우리 모두가 배워야할것은 바로 이런 형태의 사랑입니다.
--- '네 번째 편지 : 진보적인 교사의 자질에 관하여'에서
교사의 역할을 부모의 역할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부모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평가절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일을 단순히 양육하는 일로 환원하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굗 교사의 가치가 안정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지만 브라질 상황에서 교직을 양육으로 환원하는 것을 수용한다면 교사의 전문적 책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즉 전문직의 개발을 통해 정치적 과제의 실현에 영구적으로 참가해야 할 책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교사를 단지 부모의 역할로 격하하면 브라질 상황에서 정치적 과제는 희석되어버립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자녀 양육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브라질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가르침과 양육 - 양육마저 브라질에서는 문화적으로 저급한 수준에 있습니다 - 을 동일시함으로써, 교사들이 부당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에 참가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부당한 노동조건 아래서 학생들의 실현 가능한 최선의 교육을 받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묵살당합니다.
내가 보기에 가르치는 일과 양육하는 일을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런 거부가 가르치는 일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막아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허위적인 동일시에 친숙해지도록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연막을 손쉽게 벗겨낸다는 점입니다. 가르치는 일과 양육하는 일의 동일시는 브라질 전역에 걸쳐, 특히 사립학교에서 강조되어 왔으며, 이것은 교사들이 훌륭한 부모라는 이유로 결코 파업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녀의 발달을 위해 파업하는 부모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이데올로기는 교사들이 학교 행정가와 정치가에게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함으로써 학생들의 편에서 저항하는 필수적인 능력을 앗아갑니다. 그리고 도저히 참기 힘든 노동조건에 반대하는 교사들이 저항을 수많은 부모들, 틀히 지배계급 부모들이 나서서 가로막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사들이 많은 공립학교의 비참한 노동조건에 항의해서 파업하는 것까지도 가로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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