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의 다리 :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잇는 다리로, 형을 신고 받은 죄인들이 감옥으로 가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면서 다리 창문으로 바깥 세계를 바라보며 탄식을 한데서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p.77
이탈리아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누구나 지나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마음대로이다. 내가 아무리 이탈리아를 동경하고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해도 도저히 이탈리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 p.173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나폴리인은 칸초네로 인생을 노래하고, 식도락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긴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나폴리에 가 보자'라는 말이 있듯이 나폴리를 보지 않고는 인생도 예술도 사랑도 죽음조차도 논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이다.
--- p.89
<정이 깊은 나폴리 여자>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 <앗누타 스피나 Assunta Spina(1915)> 는 금세기 초 나폴리를 무대로 한 영화로서 현대극의 대표작이다. 원래 살바토레 디 자코모의 소설을 구스타보 세레나 감독이 영화화한 것으로 사회와 인간의 진실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영화를 대표한다. 따라서 자기 희생과 자기 연민의 신파와는 처음부터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남는 인상은 신파와 딱 들어맞는다.
이 영화가 네오리얼리즘의 선구적 작품이라고 일컫는 것은 여주인공의 마지막 허영스런 몸짓 때문이 아니라 종말로 이르기까지의 인간관찰, 심리묘사 때문이다. 라파엘레가 앗순타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낼 때, 그 자리에 약혼자인 미켈레가 있음에도 앗순타는 라파엘레의 시선을 요염하게 받는다. 그리고 오직 목적을 위해 앗순타에게 접근한 페데리코에게 보이는 그녀의 집착에서는 육욕이 느껴진다. 이런 인간의 마음과 육체의 복잡함을 직시한 면이 네오리얼리즘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주연을 맡은 프란체스카 벤티니 역시 <앗순타 스피나>야말로 네오리얼리즘의 원조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 p.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도시중에서도 가장 도시다운 도시다."
조반니 베르가는 이렇게 말했다. 1840년, 시칠리아 카타니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베르가는 10대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피렌체에서 유학하고 1872년에는 밀라노에 머물렀다. 그는 밀라노에서 한 백작부인이 운영하는 살롱에 출입하면서 수많은 문학가들과 친교를 맺으며 본격적인 저작활동에 돌입했다.
카타니아의 어촌을 배경으로 한 그의 소설 『말라볼리아가의 사람들』은 나중에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흔들리는 대지>로 다시 태어난다. 말하자면 비스콘티는 베르가의 고향인 시칠리아에 마음이 끌렸고, 베르가는 비스콘티 공작가가 대대로 살았던 밀라노를 사랑하여 20년이나 그곳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알프레드 보시시오는 자신의 저서, 『밀라노의 역사』서문에서 "베르가가 말하는 '가장 도시다운 도시'의 의미는 단순히 대도시를 지칭하는 것과는 다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보시시오의 설명에 따르면 그 말의 참뜻은 "자연의 손을 빌리지 않은, 거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것이다. 베르가보다도 훨씬 이전에 밀라노가 도시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말이 있다.
"밀라노는 도시의 여왕이다."
이것은 7세기 북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랑고바르드족의 한 시인의 말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밀라노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메트로폴리스(대도시)였다. 도로를 왕래하는 마차가 차와 전차로 바뀌고, 프록 코트의 신사가 양복 입은 비즈니스 맨으로 바뀌었어도 도시의 기능과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유럽의 도시 중에서 언제나 상위를 차지했다.
--- pp.161-162
<정이 깊은 나폴리 여자>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 <앗누타 스피나 Assunta Spina(1915)> 는 금세기 초 나폴리를 무대로 한 영화로서 현대극의 대표작이다. 원래 살바토레 디 자코모의 소설을 구스타보 세레나 감독이 영화화한 것으로 사회와 인간의 진실을 강조하는 리얼리즘 영화를 대표한다. 따라서 자기 희생과 자기 연민의 신파와는 처음부터 서로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남는 인상은 신파와 딱 들어맞는다.
이 영화가 네오리얼리즘의 선구적 작품이라고 일컫는 것은 여주인공의 마지막 허영스런 몸짓 때문이 아니라 종말로 이르기까지의 인간관찰, 심리묘사 때문이다. 라파엘레가 앗순타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낼 때, 그 자리에 약혼자인 미켈레가 있음에도 앗순타는 라파엘레의 시선을 요염하게 받는다. 그리고 오직 목적을 위해 앗순타에게 접근한 페데리코에게 보이는 그녀의 집착에서는 육욕이 느껴진다. 이런 인간의 마음과 육체의 복잡함을 직시한 면이 네오리얼리즘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주연을 맡은 프란체스카 벤티니 역시 <앗순타 스피나>야말로 네오리얼리즘의 원조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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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는 이탈리아의 도시중에서도 가장 도시다운 도시다."
조반니 베르가는 이렇게 말했다. 1840년, 시칠리아 카타니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베르가는 10대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피렌체에서 유학하고 1872년에는 밀라노에 머물렀다. 그는 밀라노에서 한 백작부인이 운영하는 살롱에 출입하면서 수많은 문학가들과 친교를 맺으며 본격적인 저작활동에 돌입했다.
카타니아의 어촌을 배경으로 한 그의 소설 『말라볼리아가의 사람들』은 나중에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흔들리는 대지>로 다시 태어난다. 말하자면 비스콘티는 베르가의 고향인 시칠리아에 마음이 끌렸고, 베르가는 비스콘티 공작가가 대대로 살았던 밀라노를 사랑하여 20년이나 그곳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알프레드 보시시오는 자신의 저서, 『밀라노의 역사』서문에서 "베르가가 말하는 '가장 도시다운 도시'의 의미는 단순히 대도시를 지칭하는 것과는 다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보시시오의 설명에 따르면 그 말의 참뜻은 "자연의 손을 빌리지 않은, 거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것이다. 베르가보다도 훨씬 이전에 밀라노가 도시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말이 있다.
"밀라노는 도시의 여왕이다."
이것은 7세기 북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랑고바르드족의 한 시인의 말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밀라노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메트로폴리스(대도시)였다. 도로를 왕래하는 마차가 차와 전차로 바뀌고, 프록 코트의 신사가 양복 입은 비즈니스 맨으로 바뀌었어도 도시의 기능과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유럽의 도시 중에서 언제나 상위를 차지했다.
--- pp.161-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