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나 멧돼지가 손발을 묶을 수는 없으니 사람이 산장을 습격했을 텐데, 적이라는 게 있다면 왜 그녀를 죽이지 않고 묶어서 버려두기만 했는지 모를 일.
아닌가. 이미 죽었는데 지나치게 도저한 죽음의 상태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하고 있을 뿐인가. 스스로도 헛갈려서 입으로 후, 바람 소리를 내보고 아파, 살아 있어, 움직여, 육성으로 중얼거려도 본다. 죽은 사람은 이런 소리를 낼 수 없다. 기껏해야 시신의 분해와 함께 뒤늦게 발생하는 휘파람 같은 가스 소리만을 낼 뿐. 사신을 맞이하는 소리를.
--- pp.8~9
그러니까 간밤에. 끊어진 장면을 이어나간다. 저녁 식사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가. 두 사람만이 있던 산장에 누군가 왔던가. 생각, 생각을, 그가 생각을, 하라고 했던가, 하지 말라고 했던가. 생각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구분해야 한다고 했던가. 아니, 둘 다 아니다. 늘 생각하되,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걸리면 안 돼.
생각은 매 순간 해야 하지만, 생각에 빠지면 죽어.
--- pp.9~10
- 제 눈알을, 파내려고 하셨어요.
그를 향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한순간 잊어버린 스스로에 대해서다. 어쩌자고 마음을 놓았을까, 그가 분명 말했는데, 출발하기 전에.
이 차에 타고난 다음에는, 네 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만들 거야. 머리부터 팔다리, 몸통이고 내장이고 다 뽑아다가 도로 붙일 거다. 괜찮겠어?
퇴각로가 따로 없는 물음이 귀에 표창처럼 꽃히고, 그녀는 대답 대신 그를 한번 노려본 다음 차 문을 열고 올라탔었다.
--- pp.16~17
손잡이를 합쳐 두 뼘 길이의 칼을 집어 만지작거린다. 바로 엊그제 대장간에서 갈아 온 것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심장 한가운데 도달해보기는커녕 아직 피 한 방울 묻혀본 적도, 무언가를 썰거나 끊어본 적도 없는 깨끗한 칼날이다. 앞으로 수많은 피를 자석처럼 끌어모으고 누군가의 목숨을 필요로 하게 될 그 연장의 눈부심이 마음속에 공존하는 충동과 저항감을 거의 같은 크기와 깊이로 자극하고, 그녀는 자기가 일찍이 상상만 해보았을 뿐인 최대한의 빠르기로 몸을 돌려서…… (중략)
- 한 0.5초쯤? 망설였어. 맞지? 내가 이 새끼를 정말 찔러도 될까, 그어도 되나, 대가리를 애매하게 굴리니까 안 되는 거야. 일단 마음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 들이지 마.
--- pp.26~27
손에 쥔 금속이 땀으로 미끌거린다. 그리고 어쩌면 기회는 한 번이다. 과녁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새삼스레 손안에 차오르는 생경함을 고민할 만큼 한가롭지 않은 것이다.
놈이 달려온다.
그녀는 두 개의 손 안에 한 세상을 움켜쥐고 부숴버린다. 세상은 불과 한 번의 총성으로 인해, 짓무른 과일처럼 간단히 부서진다. 그 파열음이 벼락처럼 귓전을 갈기지만 그녀는 소리에 무너지지 않는다. 눈앞이 맵다. 이걸로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고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
--- pp.8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