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를 학생들에게 내주면서도 필자는 이 시도가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 확신이 없었다. ‘공부만 잘할 뿐, 관계를 맺거나 공감하는 능력이 약한 서울대 학부 학생들이 과연 제대로 된 소통을 기획하고 수행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학생들이 일차로 제출한 소통 기획안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들이 소통하고자 한 대상들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 일진 청소년, 농아인, 독립출판사 대표, 실천적 미디어 학자 강준만 교수, 서울대의 전설적인 동아리 선배, 혼밥족을 위한 밥친구 연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저명한 진보성향의 경제학자 이준구 교수, 문화 충돌을 겪었던 탄자니아 출신 유학생, 그리고 성매매 여성자활지원센터 관계자를 망라했다. 그 속에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고, 소통 자체도 어려우며, 어떤 의미에서 소통을 피하고 싶은 참담한 고통 속의 사람들, 사회적 약자 내지 일탈집단이 포함되었다.--- p.12
일진 문제가 전 사회적으로 의제화된 지 오래고 다양한 해결책이 제시돼 시행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까지 이 문제가 계속되고 있는지 직접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일진 문제가 애초에 해결될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면, 지금의 현실은 현재까지의 해결 방안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이미 그들의 행동 및 심리, 동기에 대해 학계의 다양한 연구가 존재한다. 우리는 일진 청소년과 직접 소통해보면서, 지금까지의 접근방식이 맞는지 틀린지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가, 오히려 나이 지긋한 학자보다 일진 청소년들의 깊은 내면을 더 효과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p.22
피해자 가족의 감정을 최우선으로 배려하며 소통에 임할 것이다. 피해자 가족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의 심리 상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따라서 가능한 여러 차례 광화문 광장을 방문하면서 소통에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다. 또한 면담을 요청하고 질문을 선정함에 있어서도 피해자 가족의 입장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할 것이다.--- p.43-44
빨갱이, 종북, 좌파, 우파, 꼴통보수. 평소 자주 접할 수 있는 단어다. 선거철이 되면 더욱 두드러지는 영호남 편 가르기. 보수-진보의 대결은 우리나라 정치 메커니즘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소통을 외친다.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아줌마도, 숙련된 택시기사도,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수업을 듣고 있는 우리도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인들의 태도를 보며 흔히들 “불통의 시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라고 툴툴댄다. 편 가르기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제대로 된 소통이 가능한가. 보수-진보이기를 자처한 언론들, 내 편이 아니면 깎아내리기 바쁜 미디어들. 자극적인 제목과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그저 정치적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에 제대로 된 소통이 가능한가.--- p.79
소통 대상으로 농아인을 선정한 이유는, 이들이 커뮤니케이션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고 듣는 과정을 통해 의사소통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농아인에게는 커다란 장벽일 수 있다. 보청기를 착용하고 사람의 입모양을 읽어 말을 하는 농아인도 동시에 여러 사람들과 행하는 대화는 어려워한다. 문자를 모르고,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며, 수화만을 사용하는 농아인의 경우에는 의사소통이 더욱 어렵다.--- p.99-100쪽
미카(Micah)는 탄자니아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으로 공부를 하러 온 친구다. 2014년 3월, 미카가 속해 있는 사회대 R반은 모든 학번이 참여하는 총 MT에 갔고, 미카 역시 여느 새내기들과 다를 바 없이 부푼 마음을 안고 총 MT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미카는 이름은 거창하게 멤버십 트레이닝(.Membership Training, MT)이면서 실상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밤새 술 게임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시끄럽게 노는 MT의 실체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한국 대학생의 MT 문화에 경악하며 그것을 가열차게 비판하였다. 그는 MT가 끝난 후 “이런 게 어째서 Membership Training이냐,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반에서 사라졌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끔 들르던 과방에서도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p.191
이 책을 통해 소개된 소통의 사례들은 이처럼 제대로 된 사회적 소통을 수행해보려 한 학생들의 노력에, 그 결과물을 제대로 소통해보려 한 필자들의 노력이 더해진 합작물이다. 불통의 아이콘인 서울대 학부 학생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소통의 길을 더듬어보게 하는 교육실험의 산물이다.
---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