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대부분 사도신경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영생을 믿사오며’ 다음에 예를 들어 “국가에 세금을 내기 전에 십일조를 내어 지역 교회를 후원할 것을 믿습니다.”라는 구절을 첨가한다면 아무리 교양 있는 교회 안에서라도 공격을 당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구급차에 태워 보내며 “여보세요, 사도신경을 엉터리로 만들지 마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덧붙이기야말로 예수가 행한 바로 그 일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쉐마 대신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쉐마를 선언했다. 예수가 추가한 것은 유대교에서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며, 그는 유대교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유대교 안에서 자기만의 가게를 연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유대교의 중심이지만, 유대교의 신앙고백인 쉐마의 중심은 아니었다. 예수가 말한 것은 유대교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 신경 안에 나타난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강조는 유대교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예수가 이웃 사랑을 자신이 설파한 쉐마의 일부분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가 이웃 사랑을 영성 형성의 중심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 준다. --- p. 22
예수 신경의 내용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면, 예수 신경의 전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사랑은 주기도문 안에 표현되어 있는데, 그 기도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예수의 독특한 기도이다. 그 이름이 사람의 입에서 말하여질 때,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이 임재하는 문을 활짝 열게 된다. --- p. 40
예수에게 그 식탁은 교제와 포용, 그리고 용납을 위한 자리였다. 예수에게 그 식탁은 예수 신경을 구체화하는 자리였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그에게 오명을 가져다주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식탁에 참석시키는 습관으로 인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 불렸다. 이 표현은 예수에 대한 율법적인 고발을 가리킨다. 예수를 고발한 이들은 순종치 않는 아들을 그 부모가 율법에 따라 어떻게 고발해야 하는지를 규정한 문구에서 따온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부모는 자식을 장로들 앞에 데리고 가서 “여기 있는 우리 아들은 완악하고 반항적입니다. 우리 말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깁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공동체 안에서 악을 제거하기 위해 그 반항하는 아들을 돌로 쳐서 죽게 한다. 세상에! --- p. 53
율법 준수자들의 식탁 이야기는 이러하다. 만일 당신이 정결하다면 나와 함께 먹을 수 있다. 만일 깨끗하지 못하다면 몸을 씻고 내일 저녁 다시 오라. 이에 비해 예수의 식탁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깨끗하든 깨끗하지 않든 나와 함께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깨끗하게 하겠다. 그의 식탁은 정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결을 만들어 낸다. 예수는 식탁이 은혜의 장소의 득기를 원한다. 식탁이 은혜의 장소가 되는 순간, 식탁은 행동하기 시작한다. 무엇을 하는가? 치유하고, 비전을 품게 하고, 소망한다. --- p. 54
우리의 명성(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정체성(우리의 진정한 모습)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성 형성은 우리가 명성과 정체성을 구분하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나 남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 시작된다. --- p. 100-101
예수 시대에 천국을 갈망하거나, 천국에 대해 깊이 묵상하거나, 혹은 천국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믿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수가 내놓은 모든 혁신적인 주장 가운데 가장 대단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바로 이곳에]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저자 번역). 예수 어록은 수많은 혁신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이것이 그 가운데 최고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믿었다. 이것은 한 가지만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 제자들이 지금 이 순간 날마다의 삶 가운데서 천국에서 살기를 기대했다. 따라서 영성이 형성된 예수의 제자들은 지금 이 순간 천국의 가치를 실천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예수의 주장은 삶을 변화시키는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pp. 162-163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장소, 다시 말해서 우리의 관점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이것이다. 마지막이 곧 시작이다. 즉, 영원한 것(마지막)에 대한 그 사람의 관점은 그에게 이 땅에서의 삶(우리의 매일 매일의 시작)에 올바른 관점을 제공한다. 영성 형성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역사의 끝을 보는 것,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묵상하는 것, 이 마지막이 우리의 매일의 시작을 이룬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대로, “그때 실천해야 할 것들을 반드시 지금 실천해야 한다.”
--- p.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