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가면 저의 이유 없는 행동에 이름이 붙습니다. 우울증입니다, ADHD입니다, 조증입니다. 판정받고 나면 인생의 가이드라인이 생긴 것 같아요. ‘맥락 없이 눈물이 난다! 우울증이다! 항우울제 처방 늘려! 상사에게 기분 나쁜 농담을 던진다! 앗! 충동성 ADHD다! 아침에 약 빼먹었군! 내일 약 챙겨 먹고 가서 죄송하다고 해!’ 이렇게요.
--- pp.6~7
저는 여전히 좋은 일이 있으면 “좋아! 너무 좋아악!” 소리 지르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에 “사랑해” 키스를 보내고, 하고 싶은 일은 당장 다 해 보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살고 싶어요. 자꾸 찾아오는, 과히 슬픈 날에는 글을 쓸래요. -중략- 아니면 최소한, 부정적인 마음을 제 글의 뮤즈로라도 부려 먹을래요. 평생 함께해 온 정신병 중 어떤 부분은 나 자신으로 이해해 받아들이고, 어떤 부분은 현명히 몰고 다니면서 살아보려 해요.
--- p.11
한 시간 동안 집중해서 엔터를 누르고 누르지 않는 게 거의 고문이었다. 작고 하얀 방에서 나는 말 그대로 미쳐갔다. 30분이 지났을 무렵에는 자포자기한 채 엔터를 누르면 안 되는 순간에도 마구 내리쳤다. -중략- “선생님… 검사가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어요.” 선생님은 독방에서 초주검이 되어 나온 내 표정을 살폈다. 검사 결과를 볼 필요도 없었다. 내 얼굴에 다 쓰여 있으니까. 저는 30분도 집중할 수 없는 지독한 ADHD 환자입니다. 저를 당장 학술 연구용으로 쓰셔도 됩니다. 최고의 샘플이 당신 눈앞에 있습니다.
--- p.49
[나] 선생님, 저 행복해요. 요즘 일이 다 잘 풀려서 그냥 항상 기분이 좋아요.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요.
[의사] 경조증으로 보입니다. 오늘부터는 경조증 약을 같이 복용하고, 항우울제 복용은 곧 중단할게요.
[나] 아니 그냥 상황적으로 정말 잘 풀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지금 이 행복한 상태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경조증약 안 주시면 안 될까요?
[의사] 그러다 사고 나요. 지금 이룬 거, 다 잃을 수 있어요.
--- p.59
ADHD 환자의 사랑이란… 과몰입과 집착의 연속이다. 내게 연애란 ‘좋으면 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나만 좋았다는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연애의 모든 조건과 상황을 배제하고 내 마음만 중요했다. (상대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이 죽일 놈의 사랑. ADHD 환자의 특징 중 하나가 낮은 공감능력이라던데… 그래서 그런 걸까?)
--- p.92
내가 꾸준히 정신과 진료를 받았더라면, 내 행동과 감정을 분석하고 치료하는 조력자가 있었더라면, 조증도 울증도 ADHD도 통제할 수 있었을까. 공부를 잘하고, 친구들과의 감정 문제도 덜 하고, 너무 많이 울지 않고 커서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온갖 감정에 휘둘려서 어른은커녕 제대로 된 자아조차 없는 것 같다.
--- p.124
조울증의 잔인한 점은, 조증 상태에서 벌인 일을 우울증 상태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증과 울증이 사이좋게 번갈아 나타나기 때문이다. 조증의 나와 우울증의 나는 마치 전혀 상관없는 두 사람 같다. 조증의 내가 벌인 사고를 처리하는 울증의 나는 눈물로 젖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며 되뇌인다. “미친 새끼….” 조증 상태의 나를 길들여 협조적인 미친 새끼로 만들어야 한다. 꼭.
이 휘둘림과 널뛰는 감정이 모두 ‘비정상’의 상태라면, 교정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료 후의 나는 무엇이 될까.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왔는데.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데 성공해서 나와 연결된 질환의 특성을 뽑아내 버리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라는 자아는 영원을 함께한 병을 제외하고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우울과 부정적인 감정을 우람하게 부풀려 끌어안고 살지만, 내가 행복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보다 더 우렁차다. 그런 내가, 감정과 감정 사이의 정중앙에 줄을 걸어두고, 줄타기하듯 평행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 p.180
병의 원인을 찾아가는 일, 치료하는 일은 가볍고 해방적이라기보다는 잔인하고 무거웠다. 병이 나 자신과 너무나 촘촘하게 얽혀 있어서, 병을 떼어놓으려면 나의 생살을 벗겨내고 뜯어내어 노출시켜야 했다. 산들바람에도 온몸이 따갑고 시렸다. 그럼에도 내 현재 상황과 감정, 내가 가진 질환의 원인을 밝혀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러 방식을 통해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을 다스린다. 병에 나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도록 매순간 발버둥친다. 위 방법들의 모든 의미는, 내가 아직 전복되지 않았음에 있다. 나는 자주 우회하고 종종 길을 잃더라도 나의 방향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 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