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 하면 너희가 너희 자신을 던질 것만 같아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시위를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내가 하는 것이 나으니까. 나는 그전에 시민운동을 하고 정치를 하느라 구를 대로 굴러 봐서 시위를 하는 여자에게 어떤 일들이 생길 것인지를 알고, 최대한 다치는 이들이 생기지 않는 방향으로 준비할 수 있으니까. 아냐, 나는 사실 이렇게 평온한 말투로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가장 절박한 여자들이 ‘마녀’가 된다는 것을 아는가? 늘 운동은 가장 절박한 이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법이다. 내 곁에는 청소년 때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가 지옥을 겪고 성인이 되어도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행히 그들은 힘들었던 고통을 잘 승화해 내고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들이 성인이 되기 전 청소년 때의 모습이 그 애를 통해 보였다. 네가 아플까 봐, 성인이 된 후에도 청소년 때 활동의 고통에 간혹 힘들어하던 이가 떠올라서, 똑같이 지옥에 뛰어드는 꼴을 볼 수 없었다. 절대 그렇게 둘 수가 없었어.
--- pp.36~37
페미니즘은 변질된 적이 없다.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계급성, 불평등과 차별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기존 사회의 권력 구조가 명백한 이상 그것을 타파하고자 하는 모든 대항 운동에는 의미가 있다.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결함이 운동을 실천하는 개개인에게서 발견될지라도, 그것이 세상이 변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운동 자체를 흠집 내려는 시도는 오히려 악의적이다. 차별주의자들이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지고 아무리 악마화한들, 구조적인 성차별이 있는 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명분을 뒤집을 순 없다. 세상은 마땅히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우리는 계속 변화해야만 한다.
--- p.43
처음에는 긴장되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 글자씩 말할 때마다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래,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몇 개월의 시간을 지나온 거다. 다 같이 밤을 새워 시위를 준비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오늘 무슨 일이 생기게 되더라도 할 일을 하자던 단단한 말들을 생각했다. 신상이 박제될 수 있고 테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산까지 시위를 하러 온 여자들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어렵게 만들어 낸 소중한 순간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막혔던 목소리를 트여내자. 그때부터는 저 뒤쪽 너머의 소리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게 들려오는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였다. 백래시가 여자들을 짓밟을 때도 우리는 이 속에 움트려 살아있다.
--- pp.92~93
오로지 여자들만이 알고 있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위험했고 우리가 어떤 전쟁을 치러 냈는지를. 우리가 가진 절박함은 세상에 닿지 않았고, 우리는 항상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여성들은 늘 끓어오르고 있었다. 쏟아지는 뉴스들을 보고 있자면 이곳이 지옥도 같았다. 성차별과 성폭력이 왜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해. 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해? 고작 내 일상에서의 최소한의 생존과 안전을 원한다는 그 말이, 왜 기존의 사회에는 닿지 않는가.
--- p.116
이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다. 이 추를 뒤집어서 그래도 해볼 만한 싸움의 기울기로 맞추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힘이 더욱 필요하다. 제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줘. 누가 봐도 이 문제는 심각하잖아. 우리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잖아. 피해자들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잖아. 같이 힘을 실어줘. 점점 더 기울어지는 이 저울을 뒤집자. 지금 되짚어 보니 이제는 알겠다. 나는 그때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 p.141
너희는 늘 살아있는 역사였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무언의 문화 속에 갇혀 어쩌면 한 번도 깨닫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던 억압을 깨닫고 각성한 총명한 이성의 증명이다. 모두가 우리를 너는 잘못되었다, 너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보편의 인간이 아니라 모성과 꾸밈을 수행해야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부속의 인간이라고 말하며 기르고 키워왔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외치며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를 깨고 태어나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억압의 기제에 순종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닌 그것을 타파하는 존재였다. 죽은 이들의 운동의 역사를 되짚으며 영화 속에서, 책과 그림으로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어쩌면 앞으로 미래를 더욱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 p.169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하면서도 나를 여성운동가라고,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되는 건지, 내가 하는 것들이 옳은 것인지, 이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었다. 내 주도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 두 달 내내 고생하고 있는데 우리가 헛짓을 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런데 영화 속에 한 달 내내 고군분투했던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아, 우리는 투쟁을 하고 있구나. 우리도 우리를 그렇게 명명해도 되는구나. 내가 지금 하는 것이 운동이라고. 저 시대 속 여자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투쟁하고 운동하고 있구나.
--- p.179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연대하여 같이 나아갈 수 있다.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평등의 방향으로 향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이 힘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면, 우리는 가부장제를 변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 p.223
언젠가는 감히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이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절망의 순간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십자가에 걸린 마녀가 되었을지언정, 여성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들던 사회에서 절망하던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의 불꽃이 될 수 있기에 나는 시위를 한 것을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p.243
모든 사회적, 경제적 맥락에서 남성중심주의를 제거할 근본적 사회재구성을 요구하는 관점의 여성주의.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지배했던 가부장제 체계에서 모든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기존의 사회적 규범과 권력에 도전함으로써 가부장제를 철폐할 길을 찾는다. 근본적 사회 재구성을 요구한다는 건 결국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언젠가 세상을 변혁시킬 것이라 공동의 약속을 하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여자들. 나는 너희 가슴에 불을 지를 거야.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 p.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