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 자체는 눈에 보이는 방향대로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은 물구나무를 서듯이 거꾸로도 할 수 있다. 만약 거꾸로 보는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에서 겪게 될 수많은 시행착오를 비껴갈 수 있을 것이다.
* 약속을 한 사람이 받게 되는 구속력은 그 약속의 공개 정도와 정비례한다. 약속이 공개되어 알게 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약속의 구속력 또한 강해져 약속을 한 사람은 그 구속력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진다.
* ‘인정, 이치, 법’을 빼놓고 인생을 논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인정, 이치, 법’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사회적 관계나 인간관계를 통섭하는 맥이 그 안에 모두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애나 모든 조직의 순환도 여기서 나온다.
* 호혜성 원리는 타인이 당신에게 베풀어 준 만큼 당신도 같은 방식으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조조가 유비에게 술 한잔을 청하면 유비 역시 그에게 다시 청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탁이 적토마를 여포에게 선물을 주었으니 여포 역시 동탁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 당연하다.
* 관우는 굉장히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누가 들어도 타당한 이유, 즉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킬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관우의 입장에선 반드시 이 세 가지 조건이 수용되어야만 스스로 떳떳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가 꼭 관우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사회생활에서도 이러한 현상들이 존재한다.
* 관우는 고대 동양의 위인 중 흔치 않게 감정이 말과 표정에 나타났던 인물이다. 이런 사람이 과도한 자신감을 드러낼 경우 사람들은 비교적 그의 말에 수긍한다. 심리학자들 역시 이전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만 가지고 그 사람의 자존심을 평가했었다. 하지만 이후 연구 결과, 얼마나 겸손한지를 떠나서 대다수 사람이 천성적으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단지 일부 사람은 이런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고 내면에 깊이 숨겨둘 뿐이다.
* 적과의 동침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삶이 그 방향으로 이끌어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이 불가피하게 선택한 길이지만 책임이 따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동상이몽은 일심동체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 자아실현의 욕구는 가장 높은 수준의 욕구로 자아성취 욕구와 자아발전의 욕구가 있다. 만약 관우에게 필요한 것이 자아실현의 욕구라면, 관우가 이루고자 하는 자아성취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관우가 원하는 자아발전은 무엇이었을까?
* 누군가를 설득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스스로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리는 법이다. 주먹구구식 대응이나 보편적인 지식에 자기 의견이나 신념이 꺾일 사람은 없다. 이미 이를 아는 상태에서 자기 관점이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전문지식만이 상대를 휘두를 수 있다.
* 원술의 무시와 혹평은 관우의 오기를 발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관우는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승부욕의 호르몬으로 건승을 기원하는 술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이 곧바로 말에 올라 전장에 나갔다. 그 시각 화웅은 여전히 승리의 기쁨에 도취해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 돌진하는 관우와 아직 시동도 걸지 않은 채 여유를 부리는 화웅, 결과는 당연히 화웅의 패배로 끝났다. 화웅은 그렇게 단칼에 목숨을 잃었다.
* 명예에 대한 갈구는 심각한 심리 장애 중 하나다. 모두 알다시피 명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권력이나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기간 쌓아 올린 인간관계의 신뢰, 덕망, 가치관과 신념이 명예를 불러온다. 원한다고 무조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자기 의지를 실현하기에는 그 가치의 몇 배나 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의욕만 앞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결단력이나 판단의 과감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부정적인 결론을 먼저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관우의 대답은 아주 칼같이 단호했다. 어차피 거절할 것이라면 반드시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맺고 끊음이 불분명할 경우 오히려 질질 끌려다니다 후환만 남기게 된다. 일단 상대에게 틈을 주면 그 틈을 파고들어 당신의 우유부단함을 조종하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대표적인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술이다.
* 인생에 곧고 빠른 지름길은 없다. 굽이굽이 장애물이 놓여있고 내리막과 가파른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두 손 들고 항복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주저앉을 것인가. 모두 자기 의지에 달려 있다. 나아가겠다는 의지만 꺾지 않는다면 기쁨의 순간이 온다.
* ‘불쌍한 척하기’는 ‘호혜성 원리’도 무효화시키는 유용한 기술이다. 동정을 유발하는 작전은 나이 불문, 지위나 힘을 불문하고 통한다. 인간애가 바탕이 된 심리의 자극으로 ‘먼저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동기를 유발한다. 어떤 자극보다 강한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었던 이번 싸움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바로 조조의 명령에 대한 하후돈의 태도다. 일반적으로 상급자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은 가장 모범적인 아랫사람들의 태도다. 하지만 하후돈은 달랐다. 절대 맹목적으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우선 상급자가 해당 명령을 내렸을 때의 상황을 파악한 뒤 그 상황에 근거하여 다시 상급자의 명령을 분석했다.
* 넘어지면 일어서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장애물을 만나면 넘어야 하고 장벽을 만나면 뚫고 지나야 한다. 그대로 주저앉거나 포기하면 절대 진일보할 수 없다. 실패나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선 자에게 다시없을 영광이 돌아간다.
* ‘타인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 어떤 개인의 외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직접 연관이 있는 이해관계자가 자리에 없을 땐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게 되지만, 해당 주체 즉 이해관계자가 자리에 있을 땐 반드시 자신의 진심을 의도적으로 포장 또는 숨기거나 심지어 왜곡하게 된다.
* 조조의 잦은 거병은 유비가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고 승패의 결과는 곧 유비의 시험성적과 같다. 이제껏 유비는 성적이 형편없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시험에 불합격하는 것은 거의 불변의 이치였다. 따라서 조조의 군대는 유비를 상대할 때 자신감이 넘칠 뿐 아니라 승리는 이미 떼어 놓은 당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변하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론 형편없는 학생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게 마련이다.
* 쉽게 얻은 것은 그 소중함이 금방 사라진다. 애지중지하는 것은 오랫동안 손에 쥐고 있기 어렵다. 그러므로 자신이 노력한 결과가 가져다준 값진 성과를 귀하게 여기자. 모든 걱정과 우려가 낳은 조마조마한 마음이나 전전긍긍하는 심리는 자신이 가진 것조차 앗아간다.
* 오만한 사람끼리는 본능적으로 서로 밀어내려는 속성이 있다. 상대를 인정하며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면에 우월감과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무성하게 키워가므로 타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기에 객관적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폄하하며 기를 죽인다. 자신의 오만함이 그렇게 만든다.
* 권위를 세울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언제 어디서든 권위를 내세우려 하지 말자.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다. 자기 입으로 내세울 수 없는 게 권위이다. 특히 권위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 제갈량이 관우의 손을 빌어 조조를 놔준 이유는 고도의 술수였다. 제갈량의 전략상 아직은 조조가 죽어선 안 되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전제다. 조조의 생사는 반드시 유비 진영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에 따라 결정할 일이지, 결코 관우의 사적인 감정 따위에 낭비해선 안 된다는 게 제갈량의 생각이었다. 만약 조조의 죽음이 유비 진영에 이익이 된다면 관우가 아니라 누구라도 화용도로 보내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형세로 봤을 때 아직 조조가 살아있는 게 유비에게 더 유리했다.
* 제갈량은 항상 관우의 기를 꺾어 자신에게 승복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자 관우를 자극하여 장사로 보냈다. 그는 관우가 위험에 처할 것을 미리 알고 유비에게 지원군을 보내도록 설득한 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관우에게 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운이 아주 좋았던 관우는 위연이 자발적으로 성을 바치는 덕에 힘들이지 않고 공을 세웠다. 제갈량은 그런 관우의 공적에 흠집을 내기 위해 위연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위연의 행위를 ‘불충불의’한 행동으로 포장해야만, 관우의 공적을 ‘불충불의’로 얻은 초라한 승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념이 ‘충의’인 만큼 ‘불충불의’는 그의 콧대를 제대로 꺾을 무기였다.
* 권위에 복종하기 전에 먼저 권위의 합법성부터 따져 봐라. 권위를 누가 부여한 것인지 확인하고 자신의 위치와 조건에 합당한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우리 삶에서 맹목적으로 권위가 부여한 권한을 부여잡지 말고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 원치 않지만 하나의 책임이 맡겨질 때가 있다. 큰 책임을 감당하고 싶지만 자신의 기대보다 작은 부분에서 책임이 따르면 불만이 쌓인다. 자기 능력이 과소평가 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원망스럽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실할수록 내일의 역할이 달라진다.
* 어쨌든 눈앞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그간 관우가 제갈량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상 자체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처사는 관우를 더욱 안하무인으로 만들었다. 결국, 관우의 오만함이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그리고 제갈량이 신신당부했던 ‘여덟 글자’는 관우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졌다.
* 자신감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감을 통해 힘든 일도 씩씩하게 이겨낸다. 하지만 자만심은 다르다. 자만심은 단순하고 쉬운 일도 망쳐버릴 수 있다. 임강정의 일은 관우의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하는 분수령 같은 사건이었다. 이날 이후 관우의 자만심은 하늘을 찌르고 자신을 신격화하는 등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악화되었다.
*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뒤 형주 수비에는 큰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강제로 이 짐을 누군가에게 맡기려 해도 맡길 사람이 없었다. 이는 제갈량의 중대과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애초 제갈량 본인은 형주에 얼마만큼의 병력이 남아 있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성 공격을 제안한 것도 그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제갈량은 조조와 손권이 현재 결탁하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형주에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관우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역시나 경험은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늘 경험에서 배움을 얻는다. 지난날 제갈량이 신야를 불태웠을 때, 관우는 백하를 막는 임무를 맡았었다. 물의 수위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둑을 터뜨려 조조 병사들을 모두 익사시킨 것이다. 그 결과 유비는 최소한의 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친 전례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시 관우도 제갈량의 능력에 감탄했다. 단지 뼛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제갈량의 오만한 태도와 근거 없는 허풍이 눈에 거슬렸던 것뿐이다.
* 호혜성 원리를 기억하는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형주의 백성이 관우를 위해 필사적으로 침입자들에게 대항하지 않은 것만 봐도, 관우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여몽이 아주 소박한 ‘인정’으로 형주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동안 관우가 민심 관리에 얼마나 소홀했었는지를 방증한다.
* 관우는 자신이 여몽의 계략에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에 가슴을 쳤다. 관우의 이런 행동은 평소에는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형주의 함락이 관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유비가 형주 수비라는 중책을 맡긴 뒤 최근에는 가절월이라는 작위까지 내렸는데, 정작 자신은 사명을 다 하지 못했으니 유비를 볼 면목이 없어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
*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성공을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성공을 쟁취하길 바란다. 만약 인생에 단 한 번의 실패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실패는 가장 장렬한 실패가 될 것이다. 관우는 이 모든 것을 다 해냈다. 그러니 인생에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