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접한 독자들은 당황할 것 같다. 철학 에세이? 사회학 에세이? 동물학 에세이? 무엇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은 고양이를 키우기 위해 종의 특징을 연구한 자료를 제공하는 책도 아니며, 고양이를 의인화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고양이 행동학에 관한 것도 아니다. 인류학의 고양이 버전 인 것도 아니다. 집고양이와 길고양이에 대한 경험적 관찰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고양이 사회학 에세이에 가까울 것이다.
--- p.8
어떤 이들은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어떻게 동물을 안다고 자신하는 것이며, 어떻게 동물을 대신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오?”라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그 무엇보다 내가 동물이므로 동물을 잘 알지요. 나는 동물을 대신하지 않고 동물로서 나의 권리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 p.13
나는 동물로서 갖는 생의 논리야말로 우리 인간을 지배하는 최고권 즉, 주권이라고 생각한다.
--- p.13
우리는 이제 동물 해방으로부터 동물, 인공지능 로봇, 외계인과의 이종 간 사랑과 섹스를 본격적으로 다뤄야 할 시대에 도착했다.
--- p.16
어떤 구역이건 고양이 사회는 그 구역에 등록된 고양이와 등록되지 않은 고양이가 있다. 등록된 고양이란 인간의 관공서에 등록된 고양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확한 표현을 찾는다면 그 구역의 ‘대지’에 등록된 고양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고양이들은 대지에 등록되어 있으며 그들의 행동반경은 대체로 자신들이 등록된 그 대지에 한정되어 있다. 즉, 고양이에게 있어 구역 개념은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대지의 영역인 것이다.
--- p.21
분뇨 냄새는 확실히 기호의 생산이다. 이제 고양이는 새로운 구역에 이미 살고 있던 다른 존재들을 한번에 파악하게 된다. 직접적인 대면 이전에 이미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며, 또한 그 존재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남기게 된다. 오줌 냄새의 교환은 대지 위에 공동으로 쓰는 한 권의 책이다.
--- p.25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말대로 군과 '가족'은 상호보완적이지 않고 대립적이고 경쟁적이다. 엥겔스는 '군' 개념이 발전하면 '가족' 개념이 축소되고 '가족' 개념이 발전하면 '군' 개념이 쇠퇴하는 것을 발견했다. 길고양이의 사회 체계를 보면 엥겔스는 틀리지 않았다.
--- p.35
계절이 돌아오듯이, 철새가 다시 돌아오듯이 경계를 넘고 계속 대지를 확장하고 또한 그 위를 순례하면서 자기의 모든 통치 영역으로 돌아와야 하는 시베리아 호랑이처럼, 고양이 왕도 그렇게 귀환한다.
--- p.41
우리는 보통 제도를 바꾸기는 쉬워도 습관을 바꾸기는 결코 쉽지 않고, 불가능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물론 습관은 제도보다 바꾸기가 확실히 어렵다 할 수 있지만, 정말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다양한 서로 다른 상징들, 모계 사회의 흔적과 그 상징들처럼 다른 문명의 상징과 같은 것들이 곳곳에서 발견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를 고안해내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제도는 습관을 전제하며 습관을 전제하지 않는 제도는 실패한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병으로 분류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건강과 관련해서 일뿐이고, 연극성 인격장애라는 사회적 장애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어떤 행동은 새로운 습관이 아직 습관이 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예비적, 전(前)의식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
--- p.62
고양이는 대지 위에 선 ‘야생 인간’이다. 만약 문명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삶 혹은 생명이 등록되어야 할 대지가 부족하거나 피폐해졌다는 의미에서다. 대지의 결핍, 대지의 부족, 대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그리고 아마도 도래할 사회는 이 대지를 되찾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생 인간’이 새롭게 서식지를 이룰 것이다.
--- p.75
수컷의 멀리 나아감, 이것이야말로 출산과 생식이 아니라 대지 그 자체를 창조하고 생산하는 진정한 독신자 기계의 운명이다. 우리는 이 멀리 나아감, 나아갈 수 있는 만큼 나아가려는 이 대지에의 의지, 하늘과 대지가 만나는 지평선을 향해 가속하려는 이 기계적 욕망을 전쟁 기계라 부를 것이다.
--- p.77
삼소노프는 파시파에(또한 반엘렉트라로서의 엘렉트라)를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생성할 가능성으로 해석하며, 인간이 주변 세계를 이해하고 탐색할 수 있는 더 우수하고 효율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찬 엘렉트라로 재구성한다. 삼소노프에게 파시파에 또는 엘렉트라는 모성주의에서 벗어난 여성성, 모든 외부성(이질성과 이국성과 이종성)과의 관계를 생성하는 토템과 그것에 뿌리를 둔 상징적 질서에 대한 상속자로서의 여성성을 의미한다. 그 형상은 장난감과 노는 소녀의 모습이다.
--- p.89
인구 소멸이란, 역설적으로 비인구적 생명이 살 수 있는 대지의 확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신호다. 독신자는 행성체의 생물학적이고, 기후학적이고, 지층적인 차원에서의 인구 소멸과 등급 체계 소멸을 향한 자생적이고 즉물적 대응이다.
---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