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의 계엄령 속에서 아주대 탈춤반도 기청연합팀도 제대로 모이지 못했다. 대학별로 유인물을 배포하는 과정에서 당국에 적발돼 수배당하고 도망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새문안교회에서 강연을 내세운 집회가 기획되었다. 당시 기독교 교회 가운데 제일교회, 경동교회, 새문안교회가 사회 참여를 많이 했다. 새문안교회에서 목사의 강연을 기화로 학생운동가들이 모였다. 이미 경찰들이 교회를 에워싸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참여자들이 건물 밖으로 나가 시위를 하려 했으나, 경찰이 교회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어 나가지 못했다. 이에 이훈구는 선배들이 말리는데도 “싸워서 교회 밖으로 나가 시위를 해야 한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 p.60-61
1987년에는 조직 규모가 더 확대되었으나, 이 서클의 현장활동가들은 현장 진입기 혹은 정착 단계였기에 그는 정치서클의 이름을 내세운 공식적인 지역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인천지역에서는 부평시장을 중심으로 가두투쟁이 일어났다. 그는 취업 준비 중이던 구성원들을 모아 오토바이로 전투를 위한 돌을 날랐다. 항쟁이 격화해 백골단과 투쟁을 벌이는 날이면, 이훈구는 투쟁에 대한 나름의 조직 지침을 만들어 집단으로 항쟁에 참여하게 했다. 한편, 당시 제파PD 그룹은 당 건설 문제인 조직 노선에 대해 단정적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위당의 건설은 대중투쟁의 고양 속에서 그 토대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지도력에 따라 경로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지향만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다산보임 사건으로 그룹의 중심 역할을 담보할 조직이 해체당하면서 각 지역 차원에서 새롭게 조직운동을 만들어 가야 했다.
--- p.86
이훈구는 전야제가 진행되는 중앙대의 한 장소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각목을 준비했다. 그런데 노힘에서조차 화염병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어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활동가를 섭외했다. 마침 부산에서 올라오는 노힘 회원들도 같이 만들었다. 그러나 화염병이 다 만들어질 즈음, 이훈구는 노힘 상근자들에게 중앙대에서 나가라고 했다. 혹여 모를 상황, 즉 화염병 제작 문제가 노힘 조직으로 연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 문제는 화염병과 막대를 다 만든 새벽녘, 이것을 대회 장소로 옮기기로 했던 다른 정치단체의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 p.152-153
그리고 노동안전보건이라는 문제가 결국 현실 노동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밑바닥에 있는 거잖아요. 우리 몸, 신체, 특히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명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가장 바닥에 있는 문제, 거기에서부터 자기가 기본적으로 가졌던 가치를 어떻게 현실화시키는가를 고민하는 거예요. 거꾸로 얘기하면 현실 정치운동이든 이런 부분들이 노동현장에서 그 문제까지를 현실화시켜 내지 못하면 그거는 민주주의도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가장 아래로 내려가 가장 직접 인간의 몸 문제로 보는 거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가장 래디컬하게 나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 p.171
155일간 지속한 이상관 투쟁은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주체로 현장 노동자를 어떻게 세워낼 것인가, 노동조합의 힘으로 노동안전보건운동을 어떻게 진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남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건강사업단(이하 ‘노건단’)은 새롭게 노동안전보건운동을 형성할 주체 세력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에 대해 고심했다. 더욱이 기존 산재운동 단체, 특히 노건연/재단법인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원진녹색병원(이하 ‘원진’) 쪽이 전문주의에 근거해 교섭 중심, 결과 확보를 중시하는 활동 방식으로 다른 산재운동 단체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에 대항할 새로운 주체 형성은 이들에게 시급한 과제였다.
--- p.207
훈구 형은 그냥 말로 혹은 머리로만 활동하신 분이 아니고 본인의 온 존재를 다 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라고 하는 게 있으면, 그런 존재 전체, 삶 전체를 다 활동에 담그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정도로 형은 삶의 대부분을 운동이나 활동이나 세상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까,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쏟아 부으신. 그러다 보니 나이가 많은 선배인데도 후배들보다 훨씬 더 다양한 참신한 아이디어를 많이 낼 수도 있고. 현장 활동을 할 때도 거의 지방 현장에 내려가서 살다시피 했고. 같이했던 활동가들이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형의 진정성을 느끼고, 그러면서 형이 생각하는 방향을 받아들이게 되는. 또, 그런 방향을 같이 추구하는 활동가로 성장하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씨앗’ 같죠. 이런 ‘활동이나 운동의 씨앗’ 같아요. 우리 주변에서 저도 제일 존경하는 선배였고요.
--- p.270-271
노동시간도 마찬가지예요. “노동시간이 OECD 1위다” 길이만 얘기해. 근데 사실은 배치도 중요하거든요. 노동자가 쉬는 시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 노동시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기획은 연구나 사측이 하고, 이들은 시키는 대로 로봇처럼, 이런 게 아니라 “노동시간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어야, 배치권이 자기한테 있어야 한다는 거죠. “나는 한 달 동안 쭉 일하고, 한 달 동안 연속 휴가를 보내고 싶어” 이런 필요 말이에요. 자본은 어떻게 시간 기획을 하고 있는가, 노동자는 자기 시간 기획을 어떻게 할 건가. 당연히 공장에서 확장해서 일터뿐 아니라 삶터, 지역이나 세상에 대한 확장으로 가야 요구나 공감이나 이런 게 넘나들 수 있다는 거죠. 이런 ‘셈법의 전환’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 p.302-303
훈구 동지는 교육할 때도 “자기 삶의 주인장이 돼야 한다”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하셨거든요. “그게 아마 너의 몸이 가져야 할 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보고, 그리고 지금 당신의 노동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깊이 한번 관찰해 보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 몸에 대한 주인, 건강권에 관한 이야기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얘기하셨던 것 같아요. 다른 문제가 아니라 “정말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문제, 내 몸에 관한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시작 아니겠냐”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하셨고, 그런 차원에서 연결돼 있었던 것 같아요.
--- p.379
반올림은 2008년 피해자 조직화와 사회적 이슈화를 위해 활동했는데, 한노보연은 각종 실천 프로그램, 전문가 지원 조직화, 언론 및 사회화, 국제연대 등 거의 모든 활동의 기획과 집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 한노보연은 반올림이 중장기적인 조직 전망을 세워가도록 추동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책위에 참가한 이훈구는 초기 반올림 투쟁을 이끌어 온 주체 중 1인이었다. “삼성과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세간의 시선이 있었고, “쓸데없는 거 한다”라는 시선도 있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도 했다. 한노보연은 이 투쟁에서 새로운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전형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 p.412
지금이 되게 중요한 시기예요, 지금이. 왜냐면 제대로 된 노동안전보건운동을 할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사람들이 중요한데 적어요. 현장이나 지역이나 이런 쪽은 특히 더 어려워요. 이 부분을 어떻게 섞이고, 아우르고, 보완해서 할 건가가 향후 10년, 20년을 가늠하게 해요. 만약 이 사람들을 잃어버리잖아요? 그럼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해요. 현재는 초입부, “뜻을 세웠다” 뜻을 만질 정도. 제대로 된 노안 활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그런 변화, 그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개별화되지 않도록 공을 들이는 것이 중요해요.
--- p.442-443
그동안 이훈구는 총자본과 총노동이 부딪히는 격렬한 시기, 그리고 그 시기에 공장점거 투쟁이라는 상을 통한 주체화 과정 이외에 일상에서 노자 간의 모순이 드러나는 공간은 주목하지 않았고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런 한계를 이훈구는 한노보연 활동을 통해서 조금 더 접근하고, 바라보고, 제대로 알아가려 노력하고, 실천하려 했다. 그 과정을 그는 ‘자기실현 과정’,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고 인식했고, “제대로 봐야 한다,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행동해야 한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인식 바탕에 ‘휴머니즘’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제대로 보면서, 그는 “이윤과 노동자의 몸과 삶이 부딪히는 경계”에서 구체적인 주체들의, 구체적인 요구에 근거한 움직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 p.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