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사역자이기 전에 나를 예배하는 예배자이기를 원한다.” 이런 감동이 마음에 오자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심령 깊은 곳에서 주님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예배자의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 주님은 저를 일 년 동안 저 아프리카 오지로 보내셨네요.” 그 순간을 나는 스스로 ‘예배자로 거듭난 날’이라고 부른다.
--- pp.23~24
예배는 어떤 자리인가? 하나님의 심판이 구원으로 변하는 자리다. 하나님의 분노가 은혜로 변하는 자리다. 하나님의 죄의 소송이 용서의 보증으로 바뀌는 자리다..... 예배는 변하지 않는 완악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변하시는 세상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음을 경험하는 자리다.... 당신이 무너졌을지라도, 심판과 저주에 노출되었을지라도 살 수 있는 이유는 예배 때문이다. 예배는 내가 변하기 전에 오직 당신을 위해 하나님이 변하시는 자리이다.
--- p.55
예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잘 아시고 다가오신다.... 설교를 통해서, 찬양 가운데, 기도 가운데 다가오신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삶에 전능하심이 나타날 것이다. 여호와이레 하나님을 불렀다면, 앞길 미리 보시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예배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벗기고 벗겨도 신비로운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이다. 예배 가운데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겠는가?
--- pp.62~63
반면에 성막은 성전에 비하면 아주 초라했으며, 한곳에 머물지 않고 늘 옮겨 다녀야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좇아 어떤 때는 해체되기도 하고, 다시 조립되기도 하였다. 오직 하나님이 머무는 곳에 성막을 세웠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면 성막도 떠났다. 성막은 예배자들에게 성전의 화려함을 보는 대신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있는지 민감하게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것을 도전한다.
--- p.71
화목제는 위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이루고, 내 옆의 사람들과도 진정한 샬롬을 누리는 제사이다. 특히, 화목제물을 받으시는 결정적인 대목이 제물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는 점이다. 처리 과정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는 이웃과 마을 사람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이고, 축제를 즐기고 친교의 장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화목제의 예배 정신은 하나님과의 화목만이 아니라 이웃과 성도 간의 나눔과 친교를 예배로 승화시키므로 예배의 지평을 넓힌다.
--- p.129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계신 곳은 차별과 배제가 아닌, 서로를 향한 관용과 배려와 포용이 넘친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계신 곳은 성전이 아니라 내 일상이다. 그곳은 경계를 넘지 않는 자족이, 공존하는 공평이, 차별이 아닌 배려가 있는 곳이다. 주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작 내가 하나님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소서. 내 삶에,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상의 구체적인 현장이 여호와 삼마가 되게 하소서.
--- p.210
예배의 모든 요소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철저히 상대화될 때 예배의 의미는 살아난다. 만일 예배가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고,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의 예배는 사마리아인의 예배요, 혼합주의의 우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예수를 만나고 나니 이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전통과 지식, 경험, 물질,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절대적인 것들이 예수 앞에서 상대화되어 버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발견하고 회복해야 할 예배의 가치이다.
--- pp.240-241
여기에서 두 가지의 극단의 예배 형태를 보게 된다. 하나는 그리심산에서 드리던 열광적인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와 또 하나는 껍데기만 남아 있어서, 그 속에 생명력이 없는 메마른 유대인들의 예배이다. 예수님은 이 두 극단의 예배를 동시에 비판하신다. 그리고 균형 잡힌 예배를 강조하신다. 사마리아와 같은 예배의 열정이 살아 있어야 하며, 유대인과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것이 영과 진리의 예배이다.
--- p.246
고난 중에 한숨 쉬고, 쉽게 절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힘으로 흔들리지 않는 그 사람을 주목하고, 그 사람이 있는 교회를 주목할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예배하는 곳은 교회당이 아니라 감옥이었다. 예배는 교회당에서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상이 예수 앞에 나오게 하는 기적은 바로 삶의 현장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로 인하여 일어난다.
--- p.267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의 자리다. 특히, 주일 예배는 한 주간의 삶을 하나님에게 올려 드리는 자리요, 새로운 한 주간을 출발하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는 예배자에게나, 예배자의 삶에 있어서나 기본이요 출발이다.... 주일 예배가 예배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예배의 기본인 주일 예배를 온전히 드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삶의 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 pp.274~275
새 예루살렘의 예배는 성경에서 보여주는 마지막 예배다. 마지막 예배가 보여주는 예배 정신은 신부 영성이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다. 예배를 통해 신랑 되신 예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면서, 흰옷과 세마포 옷을 입은 신부라는 정체성을 예배 가운데 늘 확인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주님이 신랑으로 오실 때 순결하게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신방인 하나님의 장막에 들어가 그분과 온전하고 완벽한 연합을 이루는 혼인 잔치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 pp.314~315
창세기의 에덴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피조물까지의 삼중적 사귐을,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새 예루살렘(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장막에서 온전한 연합(사귐)을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예배의 원형이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새 예루살렘은 예배의 완성이다. 따라서 예배는 종교적 의식으로 한정될 수 없으며, ‘사귐’의 범주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기에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성경의 핵심 가치들이 예배의 범주로 엮여있는 셈이다.
--- p.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