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향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이 청년들의 투덜댐은 대다수 위스키 초보자가 겪는 애로 사항을 대변한다. ‘뭔 맛인지 잘 모르겠다’, ‘독하고 써’, ‘그게 그거네’…. 싱글몰트 위스키를 줬을 때, 초보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하는 소리다. 스카치위스키의 향을 잘 구분하지 못하겠다? 그럴 때는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여러 가지 맛과 향의 위스키를 갖다놓고 비교해가며 마시는 게 도움이 된다. 위스키 향을 나누는 기준을 서양인들은 ‘스모키(훈연한) - 델리키트(섬세한)’, ‘라이트(담백하고 신선한) - 리치 (묵직하고 풍부한)’로 크게 나누기도 한다. ‘이탄 향이 난다’는 로비의 ‘스모키하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 여기에 ‘바다 냄새’까지 난다면 틀림없다. 그건 아일러의 증류소에서 나온 위스키라는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로비도 섬에서 만들었다고 단정한다.
---「아! 이 놀라운 낯선 맛 [아일러몰트 위스키와 앤젤스 셰어]」중에서
영화에서 드물지 않게 보는 사연이지만 이 영화에선 그 일련의 일들이 우리 일상처럼 잔잔하고 사소하다. 케이트나 루크 모두 장난은 초딩처럼 치지만 자잘한 돌이 날아와 일으키는 자기 안의, 둘 사이의 파문을 대하는 태도는 꽤 어른스럽다. 어떤 돌이 날아오냐고? 둘의 애인끼리 아주 작은 ‘섬싱’이 생기고, 케이트가 실연한 뒤 맥주 공장 직원들과 술 마시다가 다른 남자와 자고, 그 얘길 들은 루크는 표는 안 내지만 속이 상하고…. 사람의 마음이 의지대로 안 흘러가고, 스스로 관계의 방향을 선택한다고 하지만 그게 최선의 것인지 관성에 따른 것인지 알지 못하고….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애잔하고 스산한데 그게 짙은 여운을 남기지 않고 ‘스윽’ 스쳐 지나간다. 꼭 맥주 맛 같다. 섬세하고 다양한 맛과 향의 크래프트 비어 같다. 한 잔 두 잔 마시면 감미롭고 이런저런 취흥이 생기지만 독주들처럼 다음 잔을 절박하게 부르지는 않는 술, 중독성이 약한 대신 아무 때나 흔쾌히 마실 수 있는 술, 연인 사이보다 친구 사이 같은 술, 크래프트 비어.
---「연인 사이보다 친구 사이 같은 술 [크레프트 비어와 드링킹 버디즈]」중에서
1990년대 중반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서구의 역관계가 미국 대 소련에서 미국 대 유럽연합으로 옮겨가던 때이다. 1993년 출범한 유럽연합은 회원국 수를 늘리고, 통합의 강도도 높여 갔고 프랑스는 그 중심에 있었다. 영국은 유럽연합 회원국이면서도, 유럽연합 못지않게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몰두하는 어정쩡한 입장에 있었다. 그때 새로 부임한 영국 정보국장이 “난 버번이 더 좋아”라고 말한다. ‘우리의 노선은 미국’이라는 영화의 선언처럼 들리지 않는가. 유머 치고는 좀 섬뜩한 유머였다.
---「영국과 싸우며 만든 미국의 영혼 [버번위스키와 007 골든 아이]」중에서
[여인의 향기]는 명예와 양심에 관한 영화다. 명예와 양심은 같은 편 같지만, 타락한 사회에선 그러기 힘들다. 명예를 얻기 위해선 양심을 버리거나 양심의 질문 앞에 무뎌져야 하고, 양심을 지키다보면 명예를 얻을 기회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영화는 미국 사회가 명예와 양심의 병행을 얼마나 보장해 주느냐를 도마 위에 올려놓는, 다시 말 해 미국 시민사회의 초심을 묻는다. 거기다가 가장 미국인이라면 기억하는 잭 대니얼스를 등장시킨다.
“찰리의 침묵이 옳은지 그른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는 최소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남을 팔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고결함이며 용기이다.”
영화에서 미국 시민사회를 은유하고 있는, 이 명문 고교에서 프랭크의 독설이 통할까. 결론을 말하기 전에, 이미 관객에게는(최소한 나에게는) 통했다. 그의 말이 멋있지 않은가. 거기엔 양심이자 초심이 담겨 있다. 그 말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그 말을 하는 인물에게 그럴 만한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캐릭터 묘사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영화의 태도도 근사하다.
---「잭 대니얼스 아닌가요? [잭 대니얼스와 여인의 향기]」중에서
보통의 러브 스토리라면 남에게 뭘 어떻게 해주기 위해 발버둥을 칠 텐데, 이 영화의 남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거꾸로 자기가 원하는 것 앞에 충실하려 하고, 그럼으로 해서 이 둘은 끝까지 함께 있는다. 그런 모습이 딱하고 고맙고, 그걸 보다보면 살면서 사람에게 바랄 게 많지 않구나, 그래도 사람이 고맙구나, 그런 스산한 위로 같은 게 자기 안에 생기고, 그럴 때 [앤젤 아이스], [컴 레인 오어 컴 샤인] 등등 주옥 같은 음악들이 흐르고, 결국 목이 칼칼해지고…. 그런 식으로,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가는 이를 보면서 술 생각이 나게 하는 이상한 영화!? 술꾼에겐 모든 게 술 핑계가 될 수 있으니 자제하자.
---「죽음처럼 명료한 순수 에탄올 [보드카와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중에서
오래전에 집에서 형과 함께 [노킹 온 헤븐스 도어](토머스 얀 감독, 1997년)라는 독일영화를 비디오점에서 빌려 봤다.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젊은 남자 둘이 한 병실에 입원하게 됐다.
한 남자가 말한다. “내 머릿속에 주먹만 한 종양이 있대. 며칠 못 산대.” 다른 남자가 말한다. “나는 골수암 말기래.”
짠하다. 병실 벽에 걸려 있던 십자가도 짠했는지, 갑자기 냉장고 위로 툭 떨어지고 냉장고 문이 열린다. 그 안에 선물처럼 술병이 하나 들어 있다. 테킬라가! 둘은 술병을 들고 병원 구내식당으로 간다. 식당 냉장고를 뒤져 레몬과 소금을 찾아낸다. 테킬라를 마신다. 이때 형과 나는 비디오를 중지시켰다. 아쉽게도 집엔 테킬라와 레몬이 없었다. 대신 소주와 귤과 소금을 가져와선 텔레비전 앞에 놓고 다시 비디오를 틀었다.
---「관능을 마시면 사고도 능동적으로 친다 [테킬라와 노킹 온 헤븐스 도어]」중에서
이 영화는 술을 자못 진지하게 다룬다. 술을 빚는 노동 과정과, 주신에 대한 제사가 나올 뿐, 진탕 술 마시는 장면은 없다. 나아가 술은 투쟁의 무기가 된다. 여주인공과 가마꾼이 부부가 된 뒤, 바로 9년 뒤로 건너뛰어 일본군의 침략과 마주한다. 일본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본군에 저항한 이들을 붙잡아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 그렇게 끔찍하게 죽어간 이가, 여주인공의 양조장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이다. 주인공 부부와 양조장 일꾼들은 망설임 없이 복수에 나선다. 술독을 묶어서 폭탄을 만들어(말 그대로 폭탄주이다) 일본군 트럭을 공격한다. 가마꾼과 그 아들만 빼고 다 죽는다. 확실히 이 영화엔 단절이 있다. 원시공동체처럼 사는 행복한 마을에, 더없이 적대적인 외부세력이 침입해온다. 그러자마자 두 집단은 그대로 충돌해 터져버린다. 그리고 끝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건 비극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타오르는 햇빛으로 빚어내다 [백주와 붉은 수수밭]」중에서
영화에 나오는 술, 압생트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름에 들러붙어 있는 장식들, 이미지들이 좀 많은가. 우선 애호가들의 이름부터 대보자. 랭보, 보들레르, 반 고흐, 모딜리아니, 로트레크,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하나같이 다 수사가 되다시피 한 이름들이다. 그들은 왜 압생트를 마셨을까.
19세기 들어 부르주아지가 귀족을 대체한 뒤, 예술가들은 부르주아지들과 어울려 시류에 영합하며 돈벌이를 하거나, 아니면 가난 속에 고립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런 ‘상징적 지위 실추’의 상황에 직면해 보들레르 이하 일군의 예술가들은 일부러 자기 외모나 행동을 차별화했고, 술에 취해 사는 건 그 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랭보는 압생트를, 외모로 차별성을 알리는 한 방식인 ‘옷’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술, 혹은 술에 취해 사는 건 그 당시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는 뜻일 거다. 그렇다면 예술이 가장 많은 도발과 실험을 일삼던 그 시대에 압생트는, 예술가의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자존심이었다는 말이 된다. 금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예술가의 자존심 [압생트와 토탈 이클립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