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는 1953년 여름, 서울로 환도해 1학년 2학기를 이화동 캠퍼스에서 시작하면서 도미 유학을 결심한다. 법대에 입학할 때는 고등고시를 거쳐 판사가 되기를 희망한 아버지의 뜻을 따랐지만, 그는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컸기에 자신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침 어머니의 큰오빠의 딸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수료하고 조지아주립여자대학(Georgia State College for Women: GSCW)을 졸업한 뒤 테네시주립대학교에서 교육학석사학위를 받고 1953년에 귀국한 주정일(朱貞一, 1927~2014) 교수가 도움을 주었다. 주정일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출발해 숙명여자대학교로 옮겨 아동복지학과를 신설하고 거기서 정년퇴임한다.
---「‘도미 유학의 길에 오르다’」중에서
이홍구는 핫스혼 교수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와 예일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동시 지원했으며, 두 곳 모두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이홍구는 하버드대학교에 관심이 컸으나 핫스혼은 이홍구에게 폴 와이스(Paul Weiss, 1901~2022) 교수가 아직도 형이상학을 강의하고 있는 예일로 진학할 것을 권고했고, 그는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와이스 교수는 뉴욕시립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화이트헤드 교수의 지도를 받아 192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 브린모어칼리지(College of Bryn Mawr)에서 조교수로 출발해 예일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됐다.
---「‘예일대학교를 선택한 배경‘」중에서
이 교수는 귀국한 이후 자신의 박사학위청구논문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썼다. 그것들은 크게 보아 다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자신이 회원이었으며 한때 회장을 맡았던 한국정치학회와 한국의 정치학 현황, 그리고 자신이 집행위원을 맡았던 세계정치학회(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IPSA)에 관해서다. 둘째, 자신이 속한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한국의 대학들과 교육제도에 관해, 그리고 지식인사회와 청년문화에 관해서다. 셋째, 남북한관계와 통일, 한미관계·한일관계를 비롯한 한국의 주요한 국가들과의 관계에 관해서다. 넷째, 자원문제와 공해문제 및 환경보호문제 등을 포함한 국제적 쟁점들에 관해서다. 이 글들에서 그는 제17명제로부터 제25명제까지 아홉 개의 명제를 제시했다. 다섯째, 국내외에서 출판된 저서들을 대상으로 한 서평이다.
-’박사학위청구논문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 대한민국의 대외관계 및 국제문제 그리고 한국정치학의 현황 등’」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교수의 정치학적 사고와 저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수많은 저술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설명하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은 사례는 보기 드물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는 경우, 특히 그가 『정치학』에서 말한 ‘좋은 인간과 좋은 시민의 관계’를 상기시키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인간이라는 것이 언제나 좋은 시민이라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제왕국에서의 좋은 시민이 민주공화국에서도 좋은 시민이 될 수 없듯, 좋은 시민의 기준이란 구체적인 국체(國體)와 정체(政體)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라는 취지로 설명했는데, 이 교수는 이 설명을 때때로 인용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중에서
이홍구 교수는 1980년 4월 1일에,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그때의 제도와 관행에 따라 대통령 발령으로 정교수로 승진했으며, 1986년 9월 1일에 정교수로 재임용을 받았다.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국토통일원장관으로 입각하기 하루 전인 1988년 2월 24일에 사직할 때까지 8년 가까운 기간에 우선 정치학과 동료 교수들이 공동제작한 『신정치학개론』의 지속적 증보 작업과 『현대정치학의 대상과 방법』 편집에 참여했으며,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이 연구소를 이끌어나갔다. 동시에 1981년부터 한국공산권연구협의회 회장으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와 제휴해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 전반을 다루는 국제학술회의를 이끌었다. 1985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제13회 세계정치학회 세계대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집행위원으로 선출됐으며, 1986년에는 한국정치학회 15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서울대학교 교수로서 서양정치사상에 관한 저술을 계속하면서 사회과학연구소를 이끌다’」중에서
이홍구 교수는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서양의 정치사상과 정치철학 분야에서 지도적이었는데, 그 이전에 이 분야를 이끌었던 정치학자로는 김경수(金敬洙) · 민병태(閔丙台) · 백상건(白尙健) · 서임수(徐壬壽) · 이용희(李用熙) · 정인흥(鄭仁興) · 한태수(韓太壽)[가나다순]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들 가운데, 김경수 · 서임수 · 이용희의 경우, 국내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일제강점기이던 당시 국내의 대학 또는 전문학교에는 정치학과가 개설되어 있지 않아 그 공부는 처음부터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으로, 김경수와 서임수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에서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한 가운데 정치사상을 공부했고, 이용희는 연희전문학과 문과에서 정치사상의 기초를 닦았으며 이후 동서양 원전을 포함해 자료를 많이 소장한 만철(滿鐵) 조사부에서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연구를 심화했다. 광복 이후, 김경수는 미국의 정치학자 레이몬드 게텔의 주저를 번역했으며, 서임수는 독일의 철학자 쿠르트 슈테른베르히의 주저를 번역했고, 이용희는 서양의 정치사상에 관한 저서를 출판했다.
---「‘한국정치학계에서 서양정치사상 분야의 선학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