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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 다행한 [저자싸인]
중고도서

지독히 다행한 [저자싸인]

천양희 | 창비 | 2021년 03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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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224g | 120*188*12mm
ISBN13 9788936427320

중고도서 소개

사용 흔적 약간 있으나, 대체적으로 손상 없는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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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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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감정 중에
우울만큼 깊은 우물이 있을까
사람의 사랑 중에
옛사랑만큼 희미한 그림자가 있을까
세상의 사람 중에
시인만큼 변화무쌍한 계절이 있을까
세상의 시(詩) 중에
고독만큼 자신을 고립치로 만드는 성지(聖地)가 있을까

제각기 자기 색깔
제각기 자작(自作) 나무
--- 「제각기 자기 색깔」 중에서
―――――――――――――――――――――――――――

높은 가지의 잎을 따 먹는
단독의 기린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겉은 가시로 무장해 있지만
속은 찝찔한 물로 가득 찬 선인장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내릴 정거장이 없는 바람 같고
앉을 의자가 없는 물 같은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면 안 될까요
--- 「나는 독자를 믿는다」 중에서
―――――――――――――――――――――――――――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십만번씩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 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
--- 「있다」
―――――――――――――――――――――――――――

내가 세상에 와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묻는다면
사람의 말로 거듭 말하겠다
무릎 꿇고 앉아
남의 고통 앞에 ‘우리’라는 말은 쓰지 않았던 것
나는 왜 사람인가 물어보았던 것

내가 세상에 와
끝까지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끝까지 묻는다면
마지막 남은 나의 말로 끝까지 말하겠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 살려주고 떠나는 것
다시는 몸 받지 않겠다며
나를 잃는 것
--- 「의외의 대답」 중에서
―――――――――――――――――――――――――――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지니
온갖 목숨이 아까운 계절입니다

어떤 계절이 좋으냐고 그대가 물으시면
다음 계절이라고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봄이라고
아주 평범한 말로
마음을 움직이겠습니다

실패의 경험이라는 보석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내가 간절한 것에
끝은 없을 것입니다
--- 「몇번의 겨울」
―――――――――――――――――――――――――――

나무들이 바람을 남기듯이
시간이 메아리를 남기듯이
달이 바닷물을 끌어당기듯이

불 켠 듯 불을 켠 듯

해를 향해 가라
그림자는 늘 자신 뒤에 있을 것이니
그대는 행성이 아닌 항성

장래가 천천히
눈부셔지길 바란다
--- 「짧은 심사평」
―――――――――――――――――――――――――――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불완전하기에 세상이 풍요하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나를 잃는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시가 없는 세상은 어머니가 없는 세상과 같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그중에서도 나를 살게 하는 건
사람을 쬐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
날마다 나를 살게 하는 말의 힘으로
나는 또 살아간다
--- 「나를 살게 하는 말들」
―――――――――――――――――――――――――――

나에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물으면 나는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잘 산다는 것은 시로써 나를 살린다는 뜻이다. 어떤 일을 해도 시만큼 나를 살려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와 소통할 때 가장 덜 외롭다.
(…)
나는 앞으로도 마음이 쓰고 입이 쓸 때까지, 뭔가 멋진 것을 찾을 때까지 쓰고 쓰고 또 쓸 것이다. 나는 쓰는 시가 있어 살아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다. 살아 있어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지극한 기쁨이 된다. 이 지극한 기쁨으로 독자와 사회와 시인이 함께 시 권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열망해본다.
(…)
나이가 들었어도 질문하는 내 습관은 살아 있다. 시를 쓸 때 ‘왜? 어떻게?’가 내 물음이기 때문이다. 작고 새로운 것에 놀라고 경이로운 것에 경탄하니 질문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사람의 상처를 꽃으로 피우기 위해 시를 쓸 것이다. 시란 결국 삶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시인의 산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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