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코. 그것은 그들만의 암호였다. 한 여자를 지칭하기 위한 그들 사이의 암호. 한 여자가 있었다. 물론 그 여자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그드의 도시적 감상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암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코 앞에서 그녀를 별명으로 부른 적도 없다. 그들 끼리만 모였을 때, 지루하고 전망없는 하루 저녁 술자리에서 그녀를 지칭하느라 우연히 튀어나온 농담조의 이 별명이 암호가 되었다. ~ 그녀는 코가 아주 예뻤다. 그녀의 용모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어떤 분위기를 전달하는 반면, 그녀의 코 하나는 정말 예뻤다.
--- p.14-15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그들의 변화를 지켜 보고 있는 하나코와 그 여자 친구에 대해 공연히 적개심이 솟았다. 모두들 사회 생활을 이삼 년 한 뒤에 생긴, 애써 감추어 두었던 허탈감이 연휴의 여행중에 무장 해제되었던 걸까. 아니면 삶의 피곤과 술과 여행이 기묘한 화학 작용을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불안감.
--- p.36,---pp.18-24
그날의 밤은, 생소해서 더욱 어두워 보이는 이 여행지의 밤만큼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그는 어둠을 등지고 무릎을 오므려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태평스러운 낮은 휘파람을 부르면서 누군가가 복도 쪽으로 빨리 지나갔다. 아래쪽의 좌석에서는 요란한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침대는 여전히 세개가 비어있었다. 로마에 내리자마자 서울에 전화를 걸리라. 그의 마음은 예전에 비해 한치도 바뀐 것이 없다고. 당신의 자리가 너무도 비어 있었노라고. 꼭 한 번 아이를 데리고 베네치아에 같이 오자고.
--- p.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