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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2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92쪽 | 502g | 140*210*23mm
ISBN13 9791196888237
ISBN10 11968882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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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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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발음하는 분절음은 겨우 3천여 종인데 로마자는 그것조차 완전하게 표기하지 못했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자 각양각색의 발성 기관을 가진 기계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기계들의 현란하리만큼 다양한 흡착음, 당김음, 기식음, 떨림음, 공명음 앞에 로마자는 무용지물이었다. 어떤 기계는 음고와 억양만으로 수백 개의 다른 단어를 만들었고 어떤 기계는 배음 없이 최소의 진동수를 갖는 바탕음만으로 말했다. 그 불어내고 빨아들이고 쯧쯧거리고 쉣쉣거리고 뢱뢱거리고 왤왤거리고, 똙똙거리는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는 지구상에 단 하나, 이도 문자뿐이었다. 세종 이도(李?)가 1443년에 발명한 이 문자는 초성 중성 종성을 결합하여 398억 5677만 2340종의 분절음을 표기할 수 있었다.
--- p.13

“탐사자들이 서로 적이 될 수는 있어. 하지만 우리 사이엔 어떤 규칙이 있다고. 우린 권력의 개가 아냐. 과학자들이지. 서로에 대해 기본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있단 말야. 이번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되는지 안 되는지, 그걸 너와 내가 결정할 수 있어?” “단순한 균주 확보가 아니잖아. 방역 연합과 알린스키 사이의 전쟁에 끼어드는 거야. 일이 잘못되면 저 사람들은 널 희생양으로 만들 거야.”
--- p.45

옛 서울의 사진을 보노라면 젊고 화창하던 시절 자신의 모습이며 지인들의 모습이 망령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모습은 포충망에 잡힌 나비처럼 놀라 떨며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채를 잃지 않는다. 정들었던 세상은 검은 재로 일그러져 꺼져 가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점점 꿈을 닮아간다.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여기 혼자 있다.
--- p.59

재익은 의병들에게 성난 눈길을 돌렸다. “책! 책 어디 있나? 세종 장헌 대왕께서 지으신 어제 훈민정음 어디 있냔 말이다!” 초조한 나머지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쿨리 노릇을 하기로 작정한 듯 재익을 외면하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패배하고 사기당하고 배신당하고 쫓기고 굶주려도 끝까지 관군과 일본군을 적으로 삼고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순순히 자백을 받기는 불가능했다. 재익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이미 영국인들에게 넘겼는지도 모른다.

재익은 감리서 소속의 순시 다섯 명을 차출했다. “감리서 감옥에 가둬라. 소지품은 빠짐없이 챙겨가고 물목을 작성해.” 그러자 피를 흘리는 소년이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고 그 옆의 키 큰 소년도 눈물을 흘렸다. 재익은 마음이 너무 괴롭고 울적했다. 수 없이 탐사를 했지만 이렇게 파렴치한 짓거리는 처음이었다. 인생의 물밑은 얼마나 깊은가. 몰락의 밑바닥이 감옥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태어나지 않은 부모미생전의 시간에 더 깊은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 p.81

아이도 있고 노파도 있고 영감도 있다. 한결같이 거칠고 쉰 목소리에 추레한 얼굴들이었다. 말 그대로 즐풍목우. 부는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내리는 비로 몸을 씻으며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옷은 젖었고 피부는 터서 갈라졌다. 초라하고 애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누군들 대단한 값어치가 있겠는가. 인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데. 누군들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받을 수 있겠는가.
--- p.131

유리창 밖은 어두웠다. 한때 한국인들의 것이었던 사라져버린 삶이 저 어둠 어딘가에 스며있었다. 그리고 재익은 홀로 남겨졌다. 추호도 용서 없이 흐르고 또 흐르는 시간과 함께. 못 견디게 아내와 딸들이 보고 싶었다. 네 식구가 마주 앉아 명태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던 식탁을 생각했다. 개들을 데리고 재잘재잘 떠들면서 함께 근린공원을 걷던 여름밤을 생각했다. 아침이슬에 젖은 풀꽃처럼 산자락에 숨어 있던 부암동 카페. 자전거를 달리던 남산의 소나무숲. 성북로 끝자락의 동네 책방. 재익은 어떤 모습도 생생하게 회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억들은 떠오르자마자 홀연 사라져 버렸다.
--- p.262

이도 문자는 이 행성의 미래에 마쳐진 대가람입니다. 인공지능의 섬세하고 장대한 생각들은 섬세하고 장대한 소리로 표현되어야 하고 그건 인간의 발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어요. 인간종 역시 불변의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공지능과 경쟁하면서 진화해가야 할 종입니다. 이 지구에는 인간 자체보다 더 고귀한 것, 인간의 지고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어요. 고도의 추론으로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릴 정신적 생명이죠. 인공지능이 싫다고 이도 문자를 다 없애는 것은 미래에 대한 반역입니다!
--- p.266

벨은 자기도 모르게 아, 아 하고 소리쳤다. 소리의 신령함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다. 차디찬 세상에서 숨결과 함께 발성되는 근원모음 아. 살아있음을 증언하는 고독한 소리. 자유와 위험을 동시에 느끼는 짐승의 발성. 인간이라는 짐승이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에 작용하는 압력,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이 날 거센 압력을 느끼고 생의 의지를 내지르는 소리. 그 생명의 모음은 깜박이며 멀어져가는 별들의 심연 같은 밤하늘로 빨려 들어갔다. 벨은 이도 문자의 출발점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언어는 근원모음 아에서 시작되고 감탄사와 의성어로 이어진다. 전혀 다른 언어도 비슷한 감탄사와 의성어를 가지고 있다. 어미가 새끼를 보살피는 소리. 위험을 알리는 소리. 서로 좋아해서 함께 있고 싶은 소리, 서로 닮고 싶어 하는 소리. 소리는 생명이 우주에게 바치는 제물인 것이다 …….
--- p.270

고이즈미는 살아생전 검지손가락이었던 뼈를 들어 수지를 가리켰다. “다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어. 이 세상에 너희보다 더 못난 민족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우린 대동아 공영권을 위해, 막 떠오르는 젊은 태양의 황금 빛줄기를 위해 살았어. 비록 우린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우리가 만든 이 항구의 제도, 전신과 물류와 병원과 학교의 권익은 백 년 넘게 살아남아 모두를 복되게 했지. 그런데 너희는 뭘 했지?” 고이즈미의 해골이 우물처럼 깊은 입을 벌리고 음산하게 웃었다.

“너희가 한 일은 고작 젊은 객기를 주체하지 못한 뚱보를 숭배한 거였어. 그 뚱보의 유일한 욕망은 총을 들고 군인들과 장난질 하는 거였고 유일한 업적은 보천보 오지로 기어와서 경찰서에 방화하고 민간인 한 명을 죽인 거였지. 멍청한 성황당 숭배였어. 너희들은 열등감과 백일몽 때문에 삶 전부를 희생했던 거야.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대해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야겠다고 바라던 이상을 투사했어. 한때 성리학에 오염되었던 인간들이라 심리적으로 너무 취약했거든. 성리학 환자였어. 세상의 짐승스러움에 상처받고 세상에는 도나 천리 같이 정연한 질서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는 거지. 그래서 정신적인 승리를 추구하다가 집단적으로 돌아버린 거야.”
--- p.334

검은 먼지 하늘이 온다면 너같이 교만한 자들은 보답할 가능성이 없는 좋은 사람들의 사랑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야. 그들의 온순하고 겸허한 말들이 네가 멸시했던 진실임을 깨달을 것이야. 왜 네 이웃과 착하게 대화하지 않느냐. 너희 무조가 무어라고 했느냐. 새벽의 여신 우얼둔이 꽃피는 해안에서 하얀 머리 산으로 달려올 때. 하일레 나무가 그 길 끝에 버들솜을 눈처럼 날리며 서 있을 때. 인간과 까치의 결혼으로 태어난 신성한 수령이 하일레 나무 앞에서 묵상에 잠겨 있을 때. 무수히 일어나는 천지자연의 소리를 들으라 하지 않았더냐.
--- p.357

조선인들은 여진족을 팔천(八賤)이라 부르면서 백정, 무당, 노비, 광대 같이 대접했다. 서북 사람에겐 벼슬도 주지 않았다. 말로만 동족이었다. 여진은 조선에게 문명의 이름으로 복속당했다. 조선이 일본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수치를 겪었다. 내가 문명이다, 더러운 반편들아. 게을러터진 무지랭이들아. 너희는 나를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흉내 내어야 해. 그러면 나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언젠가 비슷해질 수는 있을 거야 ……. 오만한 대동주의와 장형의식의 끝은 언제나 최악의 결별이었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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