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우리를 비롯한 모든 중생이 행복을 키울 수 있는 가르침과 수행법을 남겨 놓았다. 그 가르침은 곧 법(法, Dhamma)과 율(律, vinaya)이다. 법은 존재에 대한 유익한 진실을 뜻하고, 율은 절제된 생활 혹은 훈련을 의미한다. 절제가 없다면 진실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즉 수행자는 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삶에서 실천할 수가 없다. 법과 율, 이 둘은 우리를 행복, 웰빙, 충족으로 인도한다는 지점에서 만난다. 오로지 이것만이 고통을 없애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 p.31
완전한 자유를 얻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법과 율의 길에서 자꾸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승복을 입었건 속복을 입었건 관계없이 떨어져 나가곤 한다. 그렇게 일탈할 때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수행의 길로 돌아와야 한다. 노력의 강도를 높이고, 도덕적 행위를 가다듬으며, 집중력을 키우고, 지혜가 떠오를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한다. 온 힘을 기울여 헌신하면 수행자는 위뭇띠(vimutti), 즉 해탈, 구원, 내적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해탈의 가능성을 품었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 pp.33-34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불교는 수치심, 공포, 두려움을 장려한다. 단 악행에 대해 그런 느낌을 가지라는 것이다. 도덕적 수치심(hiri)은 부도덕한 언행에 대한 경멸을 뜻한다. 도덕적 두려움(ottappa)은 악행으로부터 물러나 자신을 지키게 해 준다.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건전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심지어 수치심과 두려움은 “세상의 양대 수호자”라 불린다. --- p.41
마음의 추악한 힘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번뇌는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의 뿌리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다 구할 수 있는가? 율이 모든 사람의 거칠고 야만적인 행동을 멈출 수 있는가?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법과 율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기 스스로 이 길을 걸어야 한다. --- p.48
나쁜 행동을 절제함으로써, 즉 계(戒)를 지킴으로써 우리는 번뇌를 극복한다. 번뇌는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를 수치스러운 언행으로 이끈다. 마음의 집중을 훈련함으로써, 즉 정(定)을 키움으로써 강박적인 번뇌나 마음의 소용돌이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다. 마지막으로 통찰의 지혜(慧)를 통해 숨어 있던 번뇌까지 모두 소멸시킬 수 있다. --- p.49
내부와 외부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명약관화--- p.明若觀火)하지만, 둘 중 더 무서운 것은 내면의 적이다. 대부분의 외부 문제들은 내부의 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선하고, 추하고, 분열적인 힘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필요성은 절박하다. 그러나 충분한 보호를 제공하는 수단을 찾기가 쉽지 않다. --- p.54
갈망은 뚜렷하고 선명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가장 기본이 되는 번뇌는 바로 무지(avijj?)다. … 어둠(avijj?)이 빛(vijj?)에 자리를 내 주면 이해와 지혜는 완성된다. 무명이 사라진 마음은 곧 청정하고 무량한 붓다의 마음이다. --- pp.63-64
몇 년 전 다른 종교의 지도자와 대화하던 중 이 주제가 거론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나와 남 중 누굴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물었다. 그분은 둘 다 동일하게 중요하고 동시에 실천해야 한다고 답했다. 난 그 답변이 적절하다고 느꼈지만 다시 물었다. “선생님이 목까지 진흙에 잠겨 있고, 저도 목까지 빠져 있다면, 제가 선생님을 빼낼 수 있을까요?” 그분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나는 자기 스스로 마른 땅에 도달해야 남을 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붓다의 가르침도 동일한 맥락이다. --- p.69
법은 행복의 지침이라고 보면 된다. 행복이란 모든 중생의 이로움과 복지를 일컫는다. 그 말은 어떤 사람이건 종교적 성향과 관계없이 실천할 수 있음을 뜻한다. 법은 가장 좋은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 보면 된다. --- p.98
모든 사람은 사회적 집단 속에서 살아간다.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의무를 지고 있다. 단체 활동에 임할 때 우리는 자애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 곤란에 빠지면 자비를 발동시켜야 한다. 누군가 성공하면 수희, 즉 더불어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태도가 모두 부적절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세 가지 수행은 모두 불선법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자애는 이기적 욕망으로, 자비는 회피 및 두려움으로, 수희는 가식으로 타락할 수 있다.
이 같은 타락을 막아낼 마음의 요소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평정이다. 자애, 자비, 수희를 적용할 수 없을 때에는 평정을 실천해야 한다. 평정은 네 가지 거룩한 수행의 마무리이기도 하다. 나와 남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 p.108
인간의 삶을 사는 동안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베풀고, 또 명상을 통해 마음 상태를 발전시키는 일들이 모두 가능하다. 혹자가 이 모두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범인도 아니고, 위인도 아니고, 그야말로 진인(眞人, true human being)이다. 그런 사람은 남과 대할 때 스스로 행복하고, 담담하고, 평화롭다. --- p.121
명상을 통해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한다. 사띠빠타나 위빠사나의 집중되고 정확한 주의력이 없다면,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아니면 면밀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욕정이나 미움, 무지의 번뇌가 일어나 마음을 흐릴 것이다. 반면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있다면 모든 사물이 명확하게 보일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우리는 침착하게 대상에 대응한다. --- pp.140-141
붓다의 법과 율은 치우침과 편견이 없다. 세속의 존재들(puthujjana)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특혜를 바랄 것 없이 법을 수행하면 성과를 얻는다. 불교가 약속하는 것은 바로 붓다의 길을 따르면 붓다처럼 무상의 깨달음을 얻어 번뇌를 없애고 청정을 얻는다는 것이다. 붓다의 발자국을 어떻게 따라올지 알려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p.145
사띠빠타나 위빠사나를 행하는 수행자는 대상을 알아차리는(noting) 순간순간마다 거룩한 팔정도에 든다. 팔정도야말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 p.162
도덕의 실천을 통해 번뇌가 계속 약화되면 우리 행동의 결과로 고통받는 일이 줄어든다. 남을 지켜 주면서 우리는 고요와 행복을 얻는다. 이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일(parahita)”이라 불리는 것이다. --- p.165
대상이 떠오르자마자 수행자는 그것을 인지해야 한다. 대상은 지금 당장 나타나고 지금 당장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겨냥의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대상이 왜 그런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러한지 등을 물어 볼 시간이 없다. 묻기 위해 멈추면 이미 마음은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상을 놓치면 암흑 속에 떨어진다. --- pp.174-175
대상을 신중하게 관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삶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 가득 차게 된다. 이들은 번뇌의 공간을 살아가는 무명의 시민들이다. 이와 반대로 본성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지혜의 땅에 살아간다. --- p.177
개미들이 한 줄로 길을 건너고 있다고 하자. ‘개미 한 줄’은 관념에 불과하다. ‘움직이는 생물체’도 관념이다. 개별 개미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실한 본성을 보는 것이다.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알고 싶다면 이름을 붙이고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올바르게 알 수 있다. --- p.186
잠재된 번뇌의 흐름은 모든 존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의식의 흐름 속에 뿌리박혀 아예 의식과 불가분의 일체를 이룬다. 주석서들은 이 끝없는 흐름을 말라리아에 비유한다. 초기 환자는 높은 열에 시달린다. 이 강력한 병증이 범법적 번뇌와 비슷하다. 의사들은 열을 낮추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고열은 2~3일마다 반복된다. 이것은 간헐적으로 마음을 괴롭힌다는 점에서 강박적 번뇌와 비슷하다. 환자가 말라리아 약을 먹으면 열은 사라지지만 병원체는 여전히 몸속에 있다. 이것은 잠재 번뇌와 같다. 약 복용을 멈추면 다시 발병하지만 성실하게 약을 먹으면 결국 몸속의 병원체는 점점 사라진다. --- p.189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을 알지 못하고, 마음과 물질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마음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마음은 “지속성을 가진 나”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거기 의지하고자 한다. 그렇게 되면 내부와 외부의 대상들이 불변하고 영원하다는 사견을 갖게 된다. 이는 망상이다. --- p.190
위빠사나 수행은 좋거나, 나쁘거나, 중립적인 경험과 번뇌가 일어나는 것 사이의 연결을 끊어낸다. 습관적 반응이 일어나고자 하는 순간 마음챙김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 시에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마음챙김이 항상 쫓아가고 있는 게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