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너머 하늘
형수님께 여름다운 더위도 벌써 8월 하순, 며칠 후면 처서입니다. 창살 때문에 더 먼 하늘에는 크고 흰 구름이 일요일의 구름답게 바쁠 것 하나 없이 쉬고 있습니다. 오늘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신동엽의 시'를 읽어봅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물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1980.8.17
--- p.156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 p.329
이번 이사 때 가장 두고 오기 아까웠던 것은 '창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능선과 오뉴월 보리밭 언덕이 내다보이는 창은 우리들의 메마른 시선을 적셔주는 맑은 샘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창문'보다는 역시 '문'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조용히 서서 먼 곳에 착목하여 스스로의 생각을 여미는 창문이 귀중한 '명상의 양지'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연히 문을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보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형수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의 발전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 p.194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단다. 걸음이 빠른 토끼가 느림보 거북이를 훨씬 앞섰지. 그런데 토끼는 거북이를 얕보고는 도중에서 풀밭에 누워 잠을 잤다. 그러다가 그만 거북이한테 지고 말았다. 거북이를 얕보고 잠을 잔 토끼도 나쁘지만 그러나 잠든 토끼 앞을 살그머니 지나가서 1등을 한 거북이도 나쁘다. 잠든 토끼를 깨워서 함께 가는 거북이가 되자. 그런 멋진 친구가 되자.
--- p.103 화용, 민용, 두용에게 보내는 편지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은 잔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 p. 6
수많은 공간과 그것의 지극히 작은 일부를 채우는 64kg의 무게, 높은 옥담과 그것으로는 가둘 수 없는 저 푸른 하늘의 자유로움을 내면화하려는 의지.... 한마디로 닫힌 공간과 열린 정신의 불편한 대응에 기초하고 잇는 이러한 관계는 교도소의 구금 공간과 제가 맺어야 할 역설적 관계의 분질을 선명하게 밝혀줍니다. 그것은 길들여지는 것과는 반대 방향을 겨냥하는 이른바 긴장과 갈등의 관계입니다. (중략) 비단 갇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튼튼한 연대감이야말로 닫힌 공간을 열고, 저 푸른 사늘을 숨쉬게 하며...., 그리하여 긴장과 갈등마저 넉넉히 포용하는 거대한 대륙에 발 딛게 하는 우람한 힘이라 믿고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
--- pp.286-287
상처가 아물고 난 다음에 받은 약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늦고, 도리어 그 아프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기가 엇갈려 일어난 실패의 사소한 예에 불과하지만, 남을 돕고 도움을 받는 일이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되기는 커녕 더 큰 것을 해치는 일이 됩니다.
--- p.243
사람들은 누구나 어제 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는 법이지만 어제와 오늘의 중간에 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큼직한 가능성, 하나의 희망을 마련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 p.45 하룻밤의 어둠중에서
눈이 내리면 눈 뒤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번 찐하게 안 오나, 젊은 친구들 기다려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 2002/08/26 (dabida)
그러나 이 모든 사색이 머리 속의 관념으로서만 시종(始終)하는 것이고 보면, 앞뒤도 없고 선후도 없어 전체적으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됨도 사실입니다. 비옥한 토양도 못되고 거두어줄 손길도 창백합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한설을 어떻게 견뎌나갈지 아직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
--- p.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