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좁은 틈을 빠져나오는 순간이 오노나무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오노나무와 마주하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고, 그러니 나는 존재해도 좋다는 긍정적인 기분을 느꼈다. 오노나무는 착실히 늘어났다.
--- pp.49~50
그런 식으로 상상하여 번식하는 사람이 하나둘 나타났다. 잃은 자식을 새로 만드는 부모. 앞세운 반려자를 번식하는 파트너. 천수를 누린 부모를 이 세상에 다시 불러내는 자기중심적인 자식. 이상적인 친구를 번식하는 완벽주의자. 사원을 번식하는 욕심 많은 사장. 물론 아기를 번식하는 커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탄생한 사람들에게 진짜 피와 살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p.60
시리고미짱도 사실은 사람을 좋아하지? 하지만 아무도 믿지 못하지? 더 이상 배신당하는 건 이제 견딜 수 없으니까 사람을 만날 수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거잖아. 어두운 방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음습한 자신을 넘어서려는 거라면 더더구나, 다른 생명체가 되는 게 깔끔할 거 같지 않아? 나는 그런 망설임을 반복하다가 애벌레가 되었어. 그러니까 시리고미짱도 민들레 씨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 p.62
“식물 좋아하세요?”
분위기를 진전시켜 보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소라히코는 표정이 어두워지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틈을 두다, ‘아뇨’라고 대답했다.
“가까운 사람이 죽을 때마다 화분을 하나씩 샀어요. 그랬더니 너무 많아져서 시들면 안타까울 것 같아 열심히 돌볼 뿐입니다.”
--- p.75
소라히코의 혼이 히스의 잎에 머무는 걸까? 언제나 가까이 있던 소라히코의 기척을 히스가 기억하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히스가 소라히코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소라히코도 식물의 이 힘을 알고 있어서 화분을 길렀겠지.
--- p.85
‘타투 플랜트’와 ‘헤어 플랜트’를 합쳐 ‘스킨 플랜트’라 부르면서, 그것은 유행의 범주를 넘어 일상의 멋내기로 정착했습니다. 손목에 팔찌 같은 넝쿨을 차거나, 배꼽에 피어스처럼 싹을 심거나, 이끼로 눈썹을 디자인하는 순수한 패션으로부터 시작해 뜨거운 여름날 뙤약볕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이 머리에 토란잎을 우산처럼 키우기도 했습니다. 세일즈맨이 뺨에 미모사를 심어 풀과 함께 인사를 하거나, 혼자 사는 사람이 머리에 무순이나 알팔파를 상비하고 수시로 수확해 식탁에 올리는 실용적인 사용법도 널리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급자족’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신의 몸을 영양분으로 기른 식물은 자신의 일부이므로 그것을 먹는 것은 자신을 먹어 자신을 살리는 자가당착일 뿐이며 영양 섭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 머리에 난 풀을 먹으면 되지 않나, 그것은 타인의 인육을 먹는 게 아닌가 등등 논쟁은 끊임없이 들끓었고, ‘도대체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나는 식물인가?’ 하는 철학적인 물음으로까지 번졌습니다.
--- p.89
이 우주 정거장에서 지구가 알록달록한 사람꽃으로 덮이는 광경을 언젠가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바라보는 일은 소소한 행복일 테지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무리겠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행복한 꽃의 아이들이니까요.
--- p.99
간호사는 그렇게 설명하더니 호시노가 입은 연두색 환자복 상의에 손을 쑥 넣고 가슴을 펼쳐 젖꼭지를 꼬집어 돌렸다. 가슴의 피부가 문짝처럼 열렸다. 한가운데 텅 빈 곳에 고사리태엽이 있고, 태엽이 풀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더 안쪽에는 연동하는 꽃 톱니바퀴가 복잡하게 돌고 있다.
--- p.102
볕을 쬐면서 기운이 넘쳐흐르는 걸 실감했다. 몸에 근육이나 지방이 축적되어 가는 것을 여기저기 가려운 것으로 알 수 있었고, 양분을 듬뿍 옮기는 초록빛 유액이 혈관이 아닌 잎맥을 따라 흐르는 기세와 소리를 피부로 느꼈다. 광합성이란 기분 좋은 것이다.
--- p.108
감정에 이유는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봄이다. 그것 말고는 없다.
--- p.115
일흔 살이 되어 식물전환수술을 받아도 늦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더 확실한 식물전환 기술이 확립되어 있을 테지요. 그렇게 되면 함께 너도밤나무가 됩시다!
--- p.119
“난 아직 인간으로 살고 싶어.”
“나도. 아직 인간인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몹쓸 건 아니라고 생각해.”
두 개의 새싹이 된 기코와 미즈토가 웃는 것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 p.133
독말풀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면, 더 이상 멈출 길이 없다. 비틀비틀 다가가게 되고, 짙고 달콤한 향기와 함께 꽃가루를 마시게 된다. 꽃가루가 코의 점막에 붙으면, 독말풀의 나팔 모양 꽃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음악이나 시 낭송 등으로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들린다. 소리가 절정에 이르면 사람은 극도의 행복을 느끼며 죽는다.
--- p.136
인간은 이미 식물을 모시는 쪽이 되었다. 혁명은 이미 이루어졌다.
--- p.142
“이 솔방울의 비늘 하나하나가 신이야. 말하고 보니 신들의 다세대 주택이네.”
--- p.155
하지만 어째서 사람이 벚나무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많아진 인간을 나무가 잡아먹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옛날에는 온 지구가 사람으로 넘쳤다고 하니까요. 어떤 생물에게도 가장 가까이서 얻을 수 있는 영양분은 인간이었을 겁니다.
--- p.173
지금 내 몸에서는 벚꽃이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겨드랑이 아래, 목 주변, 발가락 사이, 팔꿈치 안쪽에서 초록 싹이 돋습니다. 뿌리가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겠지요. 그때까지 나는 새로운 장소를 정할 생각입니다. 이 공터와는 다른 어딘가에 나를 심겠습니다.
--- p.176
“중고 식물…. 왠지 기분 나쁜 말이네요.”
“새로운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낡았는가 새로운가는 시간 차이일 뿐이고, 심지어 식물은 더 커다란 사이클을 반복하며 살기 때문에 어느 때든 커다란 생의 흐름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가치의 문제가 아니에요. 가치로 말하자면, 어느 쪽도 가치는 마찬가지. 아까 가격 이야기와 마찬가지예요.”
--- p.181
씨앗이 튀어나올 때 ‘쟝’ 하고 징글벨을 울리는 봉숭아, ‘딴!’ 하고 피아노 소리를 내거나, 큰북의 합주 소리를 내거나, 세상에 도장 찍는 소리나 스마트폰 알림 소리도 나왔습니다. 꽃이 피는 순간 사방으로 튀듯이 큐우-팡, 하고 파열음을 내는 도라지. 총소리가 나는 나팔 백합. 달빛을 받으면 늑대 소리를 내는 달맞이꽃. 흐드러지게 핀 네모필라 군락은 바람이 불 때마다 쏴아쏴아 파도 소리를 옮기는데 마치 말 전하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꽃이 피면 짙은 향기와 함께 깊은 한숨을 쉬어대는 백서향, 분홍 재스민, 금목서. 숨을 불어넣으면 웃음소리를 내며 꽃이 빨갛게 변하는 취부용과 수국. 쭉 뻗은 넝쿨에 바람이 불거나 잎이 부딪힐 때마다 아코디언 같은 풍금의 음색을 연주하는 수세미, 여주, 스위트피와 완두콩 등의 콩과 식물. 라벤더는 방울 소리의 대 합주. 잎이 두꺼운 팔손이는 박수를 쳐서 아무리 복잡한 리듬이라도 새길 수 있습니다.
--- p.193
개발을 진척시키면서 다른 식물과 능력 차이를 발견한 게 난이었습니다. 꽃을 피우는 동안으로 한정되지만, 말을 걸면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 p.199
샤베란에 빠진 사람은 화분을 몇 개씩 사서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상태가 아니면 견딜 수 없어집니다. 말을 걸면 여러 개의 꽃이 제멋대로 대답을 하는 게 기분 좋은 것입니다. (...) 그리고 깨닫습니다. 의사소통 따위 굳이 안 된다 해도 어떻게든 통한다는 걸. 오히려 구체적인 부분까지 완전히 이해하려고 하면 서로 어긋나는 게 분명해져서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이 솟아나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죠.
--- p.200
바다에서는 중력과 달의 인력과 바람과 해류 등 여러 힘이 복잡하게 작용해 파도가 솟아오르고 너무 솟아올랐다 싶으면 무너집니다. 거기에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 파도의 메커니즘과 마찬가지로 노래하는 억새가 태어났고 노래하는 억새가 자생하는 평원에서 인간은 조금씩 변화하는 것입니다.
--- p.204
소리가 자라는 거야, 소리 합성이구나!
나는 소름이 돋거나, 그렇게 외칭구. 그 히때, 싹은 눈에 니에무 속도바치 모빌로즉.
아아, 우리는 틀렸구나, 하고 생각이 미쳤습니다. 인간을 벗어나, 이윽고 다른 생명이 되쓰이요누쿠라왁무노샤. 왜일까, 알 수가 마리쿠듸.
---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