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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중고도서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허시명 저 | 웅진닷컴 | 2001년 09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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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23쪽 | 523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01034331
ISBN10 8901034336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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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냄새 물씬한 우리 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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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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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주천강
가장 운치 있는 술기행 코스다. 술샘이 있고, 소문나지 않은 술이 있어서다. 중앙고속도로에서 신림나들목으로 빠져나가면 주처면이 나온다. 주천강가의 술샘에서 주천강을 내려다보고 나서, 무릉리로 향한다. 무릉리 장순일 씨 땍에서 신선주를 두어 병 삳르고 요선암에 이르면, 술보다 먼저 풍경에 취하고 만다. 요선계원들이 지은 요선정에 걸린 숙종대왕 어제시도 읽어보고, 복주머니 불상에 복을 빌어보기도 하면서 한나절 알딸딸하게 취할 수 있다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돌아오기 아쉬우면 북쪽으로 더 들어가 적멸보궁이 있는 법흥사의 소나무 밑에서 머물다 온다.
--- p.329
어쨌든 스님이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술을 빚어 팔다니, 이만한 파계가 없을 듯싶다. 불가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가 있다. 살생, 간음, 도적질, 거짓말 그리고 음주다. 파계로 치면 음주는 살생이나 간음과 한가지다. 납득하기 어려운 벽암의 파계에 대해 물었다.

벽암은 아주 낮고 느긋하게 운을 떼면서 직답(直答)은 피한다.
절에서는 술을 곡차라 부른다. 곡차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술이다. 절마다 술이 있었다. 통도사 술이 있고, 해인사 술이 있었다. 통도사와 범어사의 누룩은 특히 유명했다. 곡차는 선승들에게 필요한 기(氣) 음식이다. 찬바람 도는 산중 냉골 마루나 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기다 보면 몸에 병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고산병이다. 그 병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선승들은 곡차를 즐겼다. 물론 술은 금기다. 그러나 선승들은 그 금기의 벽에 쪽문을 내고 드나들었다. 금기는 존재하지만, 그 벽을 자유롭게 넘나든 것이다.

--- pp 21~24
약주는 손끝 발끝부터 취한다. 특히 소곡주는 손끝 발끝부터 취하는 대표적인 술이다. 취해도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예전 선비들이 약주를 마시고 시를 읊고 거문고를 즐겼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몸은 취했지만 머리만은 멀쩡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소곡주를 앉은뱅이술이라고 부르는데, 그 유래로 몇 가지가 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목을 축이려고 주막에서 소곡주를 홀짝이다가, 저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낮은뱅이가 되어 과거 시험을 놓쳤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술맛을 보던 며느리가, 술에 취해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었다는 얘기다. 세번째는 도둑이 물건을 훔치다가 술독에서 술을 떠먹고 일어나지 못했다 하여 생긴 말이란다. 세 이야기 모두, 술 마신 사람은 정작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지다.
--- pp 167
술 빚는 요령에 대해서 묻자 벽암은 둥글게 둥글게 묘사하라고 한다. 비방을 감추기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벽암은 술이라는 것이 컴퓨터를 작동하는 2진법의 체계가 아니라고 한다 .아무리 일러준다고 해도, 그리고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도 똑같은 술이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벽암은 수왕사의 석우 스님에게서 술을 배울 때에, 같은 방에서 같은 재료로 서로 술을 빚는데도 술맛이 다르더라고 했다. 모악산의 풍경이 발길에 따라 마음에 따라 달라지듯이, 술맛은 손길에 따라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송화 향이 어떻게 잡히는지 궁금하다. 그 비책을 알고 싶다. 벽암은 다시 옛날 얘기를 꺼낸다. 송하주라는 것이 원래 소나무 밑에다가 술독을 묻고, 술독 속에 소나무 뿌리를 한 가닥 넣어두었다가 100일 뒤에 마시는 술이라고 했다. 그리고 와송주(臥松酒)가 있다. 이 술은 비스듬히 누운 큰 소나무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술을 빚어 넣는데, 역시 소나무를 깎아 마개를 하고 그 위를 진흙으로 바른 다음 풀로 덮어 빗물이 새어들어가지 않게 한다. 그 술이 익으면 향이 기가 막히게 좋다고 한다.

송화백일주가 어떤 방법을 쓰는지 스님은 끝내 밝히지 않았고, 나 또한 끝까지 캐묻지 않았다. 송화주 서너 잔에 취해 모악산 그림자를 벗어나는데, 내 머릿속에서 이런 소리가 웅웅거렸다. '진묵이나 벽암은 내가 포착할 수 없는 거대한 산 그림자야, 모악산의 산 그림자야.'
--- pp 25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비율로 똑같은 노력을 들여서 빚은 술인데, 어떨 때는 망치고 어떨 때는 잘 됐다. 그게 이상하여 곰곰 돌이켜보았더니,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술을 빚으면 꼭 탈이 났다. 그 사실을 나이 들어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술을 빚을 때면 모든 것을 단절하고, '일구월심(日久月深) 지극 정성으로' 술에 전념한다.
--- p.58
그이를 따라 술도가에 납품하는 누룩을 딛는 현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빻아 온 생밀을 우선 뜨거운 물에 갠다. 마치 황토를 개듯이, 바지를 걷어 올린 아낙네들이 종아리를 드러내고 밀을차지게 밟아낸다. 반죽이 잘 된 누룩울 한 삽씩 메주만하게 떠서 던져주면, 이를 보자기에 싸서 발로 딛기 시작한다. 뒷짐을 지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팽이처럼 뱅글뱅글 연신 돌면서 모양을 낸다. 가운데는 얇게, 둘레는 도톰하게 마치 쟁반처럼, 피자처럼 둥글 넓적하게 만든다.
(...)

이렇게 빚어진 누룩은 밀폐된 누룩방으로 들어간다. 황토방에 온돌을 깐 창문 없는 방에는 중앙 통로 양옆으로 층층이 받침대가 있다. 그 받침대는 공기가 잘 통하도록 대발로 만들어졌고 바닥엔 짚이 깔려 있다. 짚 위에 누룩을 올려놓고 나서 군불을 때는데, 온도가 섭씨 30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게 하여, 누룩 안의 수분이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와 곰팡이가 내려앉기 좋도록 한다. 누룩 위는 수분이 증발하지 않도록 얇은 천으로 덮어주는데, 이틀이 지나면 누룩 위에 하얀 눈송이처럼 소복이 흰곰팡이가 내려앉게 된다. 그렇게 15일 동안 누룩방에서 잠을 자고 나면, 누룩에는 희고 노란 곰팡이꽃이 야무지게 앉게 되는데, 이를 다시 누룩방 바닥에 세로로 세워서 1주일간 바짝 말리면 장기 보관할수 있게 된다.

금정산성 토산주의 맛은 오랜 연륜을 지닌 누룩에서 나온다. 누룩은 단순한 밀기울 덩어리가 아니다. 그 손에서 그 지방의 물과 공기와 햇살과 바람이 들어 있다. 사람의 발끝과 손끝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 지방에서만 떠도는 곰팡이들이 빚어내는 작품이다. 그래서 누룩은 지방마다 다른 빛과 맛을 지닌다.
--- pp 51~54
그 요선계 규약 속에 재미난 게 있었다. 물론 술과 관계된 것이다. 내부 규율을 어기면 벌을 주는데, 네 등급이 있다. 가장 약한 형벌은 가볍게 책임만 묻고, 조금 무거워진 형벌은 제진(齊進)했다. 한 단계 더 무거운 형벌은 손도(損徒, 따돌림하여 상대하지 않고 농기구도 빌려주지 않는다)하고, 가장 무거운 형벌은 영출(永黜, 영원히 추방)하다고 했다. 추방하다니, 아주 강력한 규율을 지닌 셈이다.

그런데 용서해주는 쪽문이 있었다. 그 쪽문의 열쇠가 바로 술과 안주였다. 제진은 청주 한 동이, 탁주 한 동이, 큰 주안상 한상이면 용서하고, 따돌림은 청주 두 동이 탁주 두 동이 큰 주안상 두 상을 차리면 용서하고, 영원히 추방하는 죄는 청주 세 동이 탁주 세동이 큰 주안상 세 상을 바치면 말끔히 용서해준단다. 죄주는 것은 엄한데, 용서하는 것은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요선계 총무는 그 당시에는 청주 한 동이 탁주 한 동이 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무릉도원다운 흥미로운 사면법이다.

나는 늦도록 요선계 총무가 보여주는 요선계의 장부를 들춰보며, 옛날 하인들의 재미있는 이름들(민 기토리, 조 담사리, 홍 기리금 등등)에 홀려 그 댁에서 하룻밤을 묶었다. 다음날 아침엔 요선정에 함께 가서, 양사언이 썼다는 요선암글자를 확인해보기로 약조하고.
--- pp 3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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