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짓는 사람으로서 나는 목소리를 대리하는 방식 대신, 또 다른 목소리가 되어 덧대는 방식을 생각한다. 모사나 패권적 쟁취가 아닌 나와 남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일. 강박적으로 구성된 상상의 천국에서 안온하기보다는 내가 아닌 무엇이 되어봄으로서 현실의 한계를 머리로라도 느껴보는 일. 이 과정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얼마나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얼마나 타인이 되어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예의와 비겁을 넘어, ‘쓰기’에서 ‘되기’로.
---「이현석, 나의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중에서
친구 경애가 사진혼인 이야기를 꺼낸 건 여름방학을 앞두고였다. 아버지가 받아 보는 신문에서 평양과 서울의 여자들이 사진혼인을 통해 미국으로 간다는 기사를 읽었다고 했다. 10대 중후반이면 혼인을 하던 시절이었다. 경애도 연희도 열여덟, 중매쟁이들이 가끔 집을 드나들곤 했다. 경애는 새로운 정보도 전해주었다. 마산 사는 박금우라는 이가 하와이로 사진혼인 가서 부모를 많이 도왔다는 거였다. 그이도 마산에서 일찍이 신식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체격도 씩씩해서 여자로서 한자리하는 해방 여자였다는 이야기는 모두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김현아, 연희가 오기까지」 중에서
보육사라는 직업을 참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내가 나는 가장 좋다. 어떤 사람과 함께 관계를 맺고 서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표정과 다른 말투를 쓰게 되는데, 그룹홈에서 아이들과 있을 때 내 모습을 꽤 편안하게 느끼고 좋아한다. 아이들 앞에서는 거짓 웃음을 짓지 않아도 된다. 꾸미지 않아도 아이들이 다 받아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표현하기 힘든 고마움을 느끼곤 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나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줄 때마다 묘한 감정이 생기는데, 날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같기도 하다.
---「서은혜, 닫아둔 그곳, 열두 시간 이야기」 중에서
이곳에서 기꺼이 문화예술활동 ‘하기’를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디영화를 트는 작은 상영회, 공연장에서 신인 뮤지션을 발견하게 되는 기쁨, 책을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는 시간들. 우리 삶에 조금이라도 다양성을 부여하는 즐거움이 이를 지속하게 한다. 그것을 함께하려는 동료가 있어 계속해 나갈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늘 아쉬운 지점은 그것이다. 어째서 지방의 서사는 서울 보편 서사에 대항하는 방식으로만 읽히고 쓰여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가 원하는 건 각자의 자리에서 그저 삶이 조금 더 다채롭고 즐겁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최윤경, 대구에서 문화예술활동 ‘하기’」 중에서
두 남자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는 슬리퍼만 뒹굴었다. 밑창이 닳고 닳은 삼선 슬리퍼. 그제야 필호는 자신이 맨발인 것을 알아차렸다. 필호는 주인을 잃은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끌고 다닌 슬리퍼가 발에 꿰어지지 않았다. 슬리퍼는 필호의 발을 맥없이 통과시켰다. 발바닥에 아무 감촉도 없었다. 분명 땅을 딛고 있는데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필호는 소스라치며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 어디선가 끄윽끄윽 소리가 들렸다. 신음 소리인지 울음을 삼키는 소리인지 모를 기척이 시작되는 곳에서 사람 형상의 검은 실루엣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김경욱, 한 사람만 데려갈 수 있다면」 중에서
이런 얘기 진짜 웃기지만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해 본 적 있어요?
현철이 말했다. 엉성하게 담배를 피우며, 엉성한 말투였다.
전 없어요. 매번 고비의 고비의 고비. 이거 넘으면 또 이런 게 기다리고 있고. 근데 조금은 나아질 수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 그 방법이 비열해 보이고 엿 같아 보여고 역겨워 보여도. 어쩌겠어요. 그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은 걸……. 그게 진짜 존나게 받고 싶은 걸…….
---「김남숙, 파주」 중에서
자기 앞의, 어쩌면 우연으로 가득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임, 그러므로 매순간 새롭게 시작하기.
사랑이란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그게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그다음의 일들은 저절로 일어난다. 사랑을 통해 나의 세계는 저절로 확장되고 펼쳐진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길. 기뻐하는 것을 더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을 더 사랑하길. 그러기로 결심하고 또 결심하길. 그리하여 더욱더 먼 미래까지 나아가길.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중에서
정승빈은 제단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믿음이 부족한 죄. 의심에 귀를 기울인 죄. 증거를 바란 죄. 고난을 거부한 죄. 수많은 죄를 열거하다 보니 진실로 울음이 터졌다. 그렇지만 하나님. 그렇지만 하나님. 감정이 북받쳐 정승빈은 결국 고백을 끝맺지 못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열하는 정승빈의 눈물을 가리키며 목사는 성령을 맞이한 기쁨이라고 선언했다. 그것이 정말로 성령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승빈은 쏟아지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윤치규, 스스로 고난에 처하사」 중에서
장국영은 정확히 말하자면 홍콩 야자나무로, 2년간의 반지하 생활과 불규칙한 급수 주기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왔으나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앓았다. 줄기가 늘어지고 잎이 자꾸만 말라붙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식물에게 보약이라는 빗물을 맞히려 한 것이 화근이었다. 집 앞 화단에 내놓은 지 한 시간 만에 장국영은 납치당했다. 나는 우산 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외부인이 이곳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납치범은 이웃 주민일 확률이 높았다.
---「임선우,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중에서
경완은 등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고승재가 뒤에서 선생님, 민 선생님, 하고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완은 궁금했다. 쟤들은 이 한낮에 어떻게 학교를 땡땡이 치고 나온 걸까? 왜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까? 어째서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수챗구멍을 향해 빙글빙글 빨려드는 오수처럼 늘 나라는 한 점으로 모여들고 말까?
---「최민우, 힘내는 맛」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