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말에 전기밥솥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다 먹었죠.”
“뭐? 밥을 다 먹어?”
엄마가 화가 나서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전기밥솥은 엄마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자, 이제 운동회에 갑시다.”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러곤 몸통에서 스륵 쭉, 스륵 쭉, 팔과 다리를 내더니, 전기밥솥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려 맨손체조를 시작했다.
--- p.12-13
운동회가 시작됐다.
내가 나가는 건 ‘달리기’와 ‘바구니에 공 넣기’ 그리고 ‘줄다리기’다.
아빠는 ‘쪽지에 적힌 물건 찾아오기’에, 엄마는 ‘코알라 경기’에 나간다.
“그건 그렇고. 이봐요, 전기밥솥 양. 네가 잘하는 건 뭔지?”
엄마가 그렇게 묻자 전기밥솥이 말했다.
“전기밥솥 양이라뇨, 그냥 편하게 쿠자라고 불러주세요. 유명한 전기밥솥 쿠쿠나 쿠첸이 다 쿠로 시작하잖아요. 게다가 겐이치 어머니와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데요, 뭘.“
그러자 엄마가 배시시 웃었다.
“흐음, 그나저나 우리 쿠자가 나갈 만한 경기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쿠자도 싱긋 웃었다.
하기야 엄마와는 서로 마음이 잘 통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 온 지 꽤나 오래됐으니까.
--- p.22-23
“아니, 이게 대체 뭐니?”
“얘 이름은 이게가 아니고요, 선생님. 쿠자예요. 저랑 사촌 남매 같은 사이라고나 할까요.”
내가 쿠자를 돌아보았다.
“네, 선생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겐이치 동생 쿠자라고 해요.”
쿠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름은 그렇다 치고, 네가 달릴 수 있겠니?”
선생님이 그렇게 말한 순간, 쿠자 정수리에서 ‘삐이-’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두 말 하면 잔소리죠. 아무리 학교 선생님이시지만, 겉만 보고 그렇게 섣불리 판단하시는 건 아니죠.”
쿠자가 조리 있게 할 말을 다 하니까 선생님이 쩔쩔맸다.
--- p.28-29
쿠자가 냉큼 나서는 게 아닌가.
“있잖아, 나 지금까지 누가 업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겐이치, 내가 내신 나가도 괜찮지?”
“엄마, 어떡해?”
나는 엄마를 쳐다봤다. 나도 요즘엔 엄마한테 업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엄마가 금세 허락했다.
“어떡하긴. 겐이치 대신 쿠자랑 나가면 되지.”
좀 아쉽지만 그러기로 했다.
“잘 하고 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쿠자는 엄마 등에 찰싹 달라붙더니, 신이 나서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호호, 아직이야. 저기에 먼저 줄을 서고, 그 다음에 업혀야지.”
엄마도 즐거운 목소리다.
“준비-, 땅!”
출발 신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 p.40-41
내가 대드니까 심술이 녀석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킬킬 웃는다.
“멍청하게 있는 쟤가 잘못이지, 내가 뭘! 같은 편에게 공 던지지 말란 법이라도 있냐!”
그러자 쿠자 머리에서 ‘삐이-’ 소리가 났다.
“진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이거지. 좋았어. 내 이걸 그냥!”
쿠자가 끈을 풀고는 내 등에서 뛰어내렸다.
“뭐야,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냐?”
심술이 녀석과 쿠자가 서로 째려보았다.
“그래, 할 말 있다, 왜!”
쿠자 표정이 싹 바뀌었다.
“야, 안 돼. 또 싸우면‥‥‥”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쿠자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순식간에 ‘탁’ 하고 머리 뚜껑이 닫혔다.
--- p.56-57
아침에 일어나니 쿠자는 이불 속에 없었다.
“엄마, 쿠자 어디 있어?”
“여기 있지.”
나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쿠자는 늘 있던 제자리로 이미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밥솥 손잡이 부분에 귀여운 리본이 달려 있다.
“아, 리본.”
“겐이치, 이것 좀 봐. 엄마가 쿠자 머리띠에 리본을 달아 줬어. 어때, 어울리지?”
“응, 쿠자가 되게 좋아하겠다.”
“이것 봐, 밥도 오늘따라 얼마나 잘 잘 지어졌나 몰라.”
--- p.7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