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굉장히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 사람과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는 지친 농사꾼. 서귤이라는 한 사람을 키우기도 힘에 부쳐서 이 좁은 밭뙈기에 다른 작물을 들일 여력이 없네.
--- p.13, 「소개팅이 잡히면 뾰루지가 난다」
그 뚱땅거리는 소리에 묻혀 구석에 앉아 밀크티라테를 홀짝이고 있으면 한없이 무색무취한 나도 덩달아 아티스트가 된 것 같았다. 우습지만 그런 착각이라도 해야지 견딜 수 있었다. 특별했던 내가 자라서 겨우 이런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던 시기였다.
--- p.38, 「나만 아는 노래인 줄 알았는데 모두가 듣고 있다」
정신과 상담 때 이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게 무섭다고 털어놓았다. 청소년기에 왕따를 당한 적이 있다. 정말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하루아침에 내게 등을 돌렸다. 이후 나를 보호하기 위해 타인에게 마음 주는 일을 꺼리게 되었다. 분명 또 등을 돌리고 손가락질하고 나를 버릴 거니까. 마음을 준 만큼 상처받을 거니까.
--- p.73, 「우산을 챙기면 비가 오지 않는다」
똑똑하고, 의욕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싶었던 그는 그렇게 두려움에 지고, 현실과 타협하고, 사회적 통념에 충성하고, 불의에 기꺼이 굴하면서 나의 아빠로 살았다. 그가 벌어 온 돈으로 나는 치킨을 먹고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뼈를 늘리고 살을 찌웠다. 부를 누려 본 적은 없지만 가난은 알지 못했다.
--- p.84, 「일 잘하는 사람이 퇴사한다」
참으로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그 절절했던 사랑 앞에서도 용기 내지 못하던 어린 나, 담 넘는 친구들을 힐끔거리며 홀로 방과 후 수업을 듣던 소심한 안경잡이 반장을 용서한 날이었다. 스스로를 오랫동안 한심해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걸 그만두어도 괜찮았다.
--- p.117, 「장우혁이랑 결혼하지 못했다」
민정이로 사는 일도 아주 멋지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 헐렁한 무채색 옷을 입었을 때 운동에 더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도 민정이로 살 수 없다. 내가 나 이외의 어떤 존재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때의 나에게는 절망이었고 지금의 나에게는 위안이 된다.
--- p.126, 「유독 못생긴 날이면 동창을 마주친다」
만약 지금 걱정거리가 너무 많아 피로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비교적 행복할 확률이 높다. 압도적인 고민이 없다는 뜻이며 대개 압도적인 고민은 삶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 p.192, 「쓸모없는 고민을 매일 한다」
나는 조금 안도했다. 방금 지나가 버린 12일은 내 생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이날이 빌린 돈처럼 부담스러웠다. 행복해야 한다거나 행복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 사랑받아야 한다거나 사랑받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숨통을 조였다. 올해도 다행히 지지 않았다. 질식하지 않았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생일 다음 날을 홀로 조용히 자축했다.
--- p.194, 「맥주 한 병에 만취하는 날이 있다」